학년별 책읽기/6학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황현산 번역, 어린 왕자, 열린책들

ddolappa72 2024. 10. 11. 15:38

 
보아뱀은 왜 코끼리를 삼켰을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31)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이 등장합니다. 마치 모자처럼 보인다고 그대로 대답을 했다간 '트럼프 이야기, 골프 이야기, 정치 이야기, 넥타이 이야기'나 좋아하는 어른이라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답을 외워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대답을 해도 상상력이 풍부한 천진난만한 아이 같다는 평가를 듣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암기한 지식을 반복하는 일은 창의성과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창의력과 순수성을 측정하는 시험지가 된 듯한 생텍쥐페리의 그 그림은 사실상 어른들을 아포리아(aporia)에 빠뜨리는 함정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어린 아이들이 이런 곤경을 회피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책을 읽지 않은 아이들한테 그 그림을 보여주면 과연 몇이나 어린 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단박에 그림의 내용을 알아맞출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우리가 생텍쥐페리를 시험에 들게 해봅시다. 아이들한테 보아뱀이 어떤 동물을 삼킨 모습을 그리도록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맞춰보도록 해봅시다. 작가는 과연 정답을 맞출 수 있을까요? 불행히도 작가가 직접 수업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아이들이 서로의 그림을 알아맞춰 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도로 그 동물을 그려넣었는지 설명해보도록 합니다. 아이들의 설명을 듣다 보니 문득 작가는 왜 그 많은 동물 중에 하필 코끼리를 그렸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번에는 작가가 왜 코끼리를 선택한 것인지 함께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접근 방법을 달리하니 아이들의 창의력이 오히려 조금은 상승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생텍쥐페리의 저 그림도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요?
 

비행사가 어린 시절 그린 그림 제1호와 제2호



소설의 화자는 자신이 여섯 살 때 <체험담>이라고 부르는 원시림에 관한 책에서 보아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보고 따라서 그린 그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보아뱀은 통째로 삼킨 뒤 소화가 될 때까지 여섯 달 동안 잠을 잔다는 설명까지 덧붙여 있습니다. 화자는 설명 없이는 이해를 못하는 어른들을 위해 뱀의 겉모습과 속모습이 그려진 두 장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보아뱀이 코끼리를 완전히 소화시키려면 몇 달이나 걸릴까요? 한 열 달쯤 필요할까요? 이 '열 달'이란 숫자를 기억하고 속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다시 들여다 봅니다. 마치 엄마의 자궁 안에 들어 있는 아기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하필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일까요? 코끼리는 사실 어린이가 지닌 최대치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의 싹이 실용적인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들의 무지와 편협함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어린 시절의 경험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작가는 "인간들 누구에게나 살해된 모차르트가 숨겨져 있다"고 적어 놓았던 것입니다.(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김윤진 번역, 인간의 대지, 시공사)


'어른들'을 어떤 사람들일까?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책을 어린이였을 때의 친구 레옹 베르트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레옹 베르트'라는 고유명사를 '어른이 되어 있는 예전의 어린아이'라는 일반 명사로 치환하게 되면 이 책은 특정한 한 개인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책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른들도 처음엔 다 어린이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어린이였던 기억을 잃어버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이 상실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와 달리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현재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알기 위해 이 책을 읽게 됩니다. 어른들도 어렸을 적에는 자신이 평생 그 시절을 그리워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 이 책을 읽는 것은 훗날 길을 잃어버렸을 때 되돌아갈 수 있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이 어른과 어린이라는 대립쌍에 기초해서 직조된 텍스트라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업에서는 이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 지 찾아 보라고 합니다. 

우선 그들은 '지리, 역사, 산수, 문법' 같은 실용적 지식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보아뱀이나 원시림 같은 허황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설명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터키의 천문학자가 전통복장을 하고 소행성 B612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을 때는 믿지 않다가 유럽식 양복을 입고 논증을 하자 모두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또 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창문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 위에 비둘기가 있는 아름다운 장밋빛 벽돌집'이라고 말하면 어떤 집인지 조차 상상하지 못하지만 '10만 프랑짜리 집'이라고 하면 곧바로 알아듣고 감탄합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 도착하기 전에 만난 왕, 허영쟁이, 술꾼, 사업가, 지리학자 등도 어른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 자신의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것 등으로 단순하게 구분합니다. 그들은 모두 술꾼처럼 부끄럽다는 걸 잊기 위해 마시고 마시다는 게 부끄러워 또 마시게 되는 순환논리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들과 관계를 맺을 줄 모르고, 그래서 모두 혼자만의 별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린 왕자가 만난 사업가



이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하고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며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어른들은 그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삶을 의미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 알기 때문에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니 이 글의 처음에 설정한 '어른 VS 어린이'의 대립쌍은 '눈에 보이는 것 VS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들은 동화의 처음에 등장한 '보아뱀의 겉모습 그림 VS 보아뱀의 속모습 그림'의 대립쌍이 변주된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서야 화자가 왜 그토록 자신이 어린 시절 그린 그림을 그토록 강조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이 텍스트 전체를 해독할 수 있는 비밀 열쇠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왜 사막에서 만났을까?

동화의 화자인 비행사는 이런 어른들로 둘러싸인 세상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좀 똑똑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그림 제1호를 꺼내서 시험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그는 그들에게 '분별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괜히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골프나 정치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만나기 전에 "진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이 혼자" 살아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행기 고장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기 전부터 '사막' 같은 환경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가 외로웠던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를 이해해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만남이 없다면 모든 장소가 사막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사막은 고독한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장소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이 책이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까닭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일깨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고독해 하고 외로워 하면서 정작 자신을 둘러싼 껍질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잔뜩 웅크린 채 이익 추구에 골몰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대 어떻게 의미있는 삶을 살 것인가, 하고.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발견한 우물



이런 맥락이 이해되어야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여우의 길들이기가 뜻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다루어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현대인의 문제에 대해 여우의 가르침 외에 어린 왕자가 제시한 해결책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어린 왕자는 비행사에게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합니다. 이때 비행사는 모래밭이 왜 그처럼 신비롭게 빛나는지 문득 깨달았다고 하며 어린 시절 살았던 고가(古家)를 떠올립니다. 그 집에는 보물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는데, 실제하지 않는 보물 이야기는 집 구석구석을 더 황홀하게 만들었습니다. 집은 이야기 덕택에 그 깊숙한 곳에 비밀을 감추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집이나 별이나 사막이나 그걸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다음 어린 왕자는 비행사를 사막 한가운데 있는 우물로 인도합니다. 마을이 없는데도 마련된 도르래와 두레박과 밧줄이 준비된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린 비행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물은 보통 음료수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 물은, 별빛을 받고 걸어온 발걸음과 도르래의 노래와 내 팔의 노력에서 태어났다."

이 장면들은 무의미하고 삭막해진 세상에 의미를 되찾아주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물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는 삶의 공간을 신비로 감싸고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보도록 합니다. 오래 된 집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은폐된 보물을 암시하는 흔적과 비밀로 가다오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장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기억에 남게 됩니다.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이 말한 것처럼 무의미한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들면 그곳은 의미와 가치로 충만한 '장소'로 발전하게 됩니다.(이-푸 투안/윤영호, 김미선 번역, 공간과 장소, 사이) 그러므로 비행사와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발견한 저 우물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 함께 만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겼던 것입니다. 혹시 사막을 여행하다가 금발의 머리를 한 아이를 만나게 되면 친절을 베풀어 달라고.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정원에서 5천 송이의 장미가 피어 있는 광경을 목격한 어린 왕자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자신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을 가진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장미가 있다니! 흔한 장미꽃 하나를 가졌을 뿐인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지고 너무나 외로워집니다. 이때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나타나 '길들인다'는 것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어린 왕자가 여우를 길들이게 되면 그 순간 어린 왕자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이 되고, 여우도 수많은 여우들 가운데 오직 한 마리의 여우가 된다고. 그리고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라고도 말합니다. 즉 여우가 말한 '길들이기'란 인간이 진정한 만남을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우에게 '길들이기'에 대해 배우는 어린 왕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말합니다.(마르틴 부버/표재명 번역, 나와 너, 문예출판사) 그에 따르면 모든 관계는 '나-그것'의 관계와 '나-너'의 관계로 구분됩니다. 1인칭과 3인칭의 관계를 뜻하는 '나-그것'의 관계는 나를 중심으로 모든 대상들을 도구이자 대상으로 파악합니다. 이런 세계는 사물들로 둘러싸인 세계이자 무의미한 세계로, 곧 사막과 같은 곳입니다. 

이에 반해 1인칭과 2인칭의 관계로 맺어진 '나-너'의 관계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배려하는 세상입니다. 처음에는 '나-그것'의 관계로 시작했어도 '그것'을 '너'로 부르게 되면, 차가운 사물들의 세계는 따뜻한 온기를 지닌 인간적 관계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너'의 관계는 진정한 만남의 세계이자 길들임의 세계입니다. 어린 왕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황량한 사막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주변의 수많은 '그것들'을 길들여 '너'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상대를 알아갈 충분한 시간과 책임감만 있으면 됩니다.

흔히 생텍쥐페리의 이 책을 김춘수 시인의 '꽃'과 연관시켜 생각하곤 합니다. 김춘수 시인의 그 시도 이름 부르기를 통해 진정한 관계 맺기에 대해 사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란 시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어린 왕자의 별을 찾아서 밤 하늘에 수놓은 수없는 별들을 헤아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관계맺기'를 지상의 인간과 우주 공간의 별로 확장시켜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규의 시 '저녁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