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5학년

찰스 디킨스/김영진 번역, 크리스마스 캐럴, 비룡소

ddolappa72 2024. 12. 1. 23:39

 
배경 지식을 꼭 알 필요가 있을까

구두쇠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유령들을 만나 새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는 많은 아이들이 직접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책을 수업 교재로 만들 때는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과 실제로 책을 읽게 되었을 때 얻게 되는 감상이 다르다는 것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유튜브나 애니메이션을 통해 알고 있는 것과 원작을 독서해서 얻게 되는 것이 차이가 없다면 굳이 책을 읽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지나치게 전문적으로 소개해서도 곤란합니다. 디킨스가 살았던 19세기는 산업혁명으로 이제 막 발흥한 초기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로 자본가들의 탐욕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열악한 노동 환경과 극악스런 빈곤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당시 처참했던 영국 사회의 불평등과 산업화로 인한 폐해를 온몸으로 경험했던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어려운 시절> 등의 작품을 통해 당대의 사회적 모순을 날카롭게 그려 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만 하더라도 악명 높은 <인구론>의 저자 맬서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생들에게 이런 배경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수업의 목표로 삼아서는 곤란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이 책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떨어지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런 배경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작가가 의도한 미학적 구조를 충분히 음미하고 감동을 느끼는 것이 먼저입니다.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사회적 정황이나 작품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은 어디까지나 예술작품을 온전히 향유하기 위해서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스크루지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살펴 보기로 했습니다.
 



 부자 스크루지는 왜 춥고 좁은 방에서 살았을까

아이들은 하나같이 스크루지가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상품 거래소를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도 동업자 말리가 죽은 날에도 일을 하고, 결혼도 안 하도 독신으로 지내는 데다, 집은 왜 그렇게 춥고 좁은 데서 사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우리는 왜 돈을 버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재미있는 놀이 동산에도 가서 놀고, 좋은 집에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 입장에서 돈은 우리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돈이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돈 자체를 모으는 것이 목적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린 시절 착하고 순한 아이였던 스크루지는 가난 때문에 외토리로 지내면서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반드시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점차 돈을 모으는 것에 쾌감을 느끼게 된 그는 점점 냉혹하고 인정머리 없는 악랄한 구두쇠로 변해 갑니다. 다시 말해 스크루지는 돈을 사용할 목적을 망각한 채 돈 자체를 모으는 일에 삶의 의미를 부여한 사람입니다. 그 결과 그는 모든 인간 관계마저 돈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어떤 이윤도 남지 않는다면 친구나 가족마저 가차없이 내팽개치는 냉혈한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춥고 좁은 방'은 폐쇄적이고 냉혹한 그의 마음에 대한 상징입니다.

한국의 대표적 구두쇠인 자린고비는 스크루지와 비교하면 그저 절약 정신이 투철한 인물일 뿐입니다. 충주 지역의 조륵 선생을 모델로 한 자린고비는 평생 구두쇠짓을 해서 모은 돈을 가뭄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과감히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크루지는 놀부와 유사한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놀부 역시 스크루지처럼 돈을 축적하는데 혈안이 되어 형제마저 집에서 내쫓아버리고, 이웃들을 착취하고 불행에 빠뜨리는 반(半)공동체적 행위를 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 휴전'을 소개한 1915년 1월8일자 영국 데일리 미러 1면 사진.

 
디킨스가 말하는 크리스마스 정신이란?

스크루지는 동업자 말리의 유령이 방문한 이후 유령들의 안내에 따라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차례로 보고 나서 개과천선하게 됩니다. 이처럼 죽음이 임박한 것과 같은 큰 고비를 넘기고 나서 이타적인 태도로 바뀌는 현상을 ‘스크루지 효과’라고 합니다. 그는 죽음을 잣대로 자신의 삶을 평가했을 때 돈보다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돈을 축적하는데 매몰된 자신이 방기한 것들이 오히려 자신의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든다는 것을 새삼 통감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스크루지가 유령들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한마디로 크리스마스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정신이란 영혼이 물질이나 돈의 쇠사슬에 묶이지 않도록 자유롭게 풀어 주는 것이며, 모두가 잘 살 수 있도록 힘쓰는 사업을 펼치는 것입니다. 또한 크리스마스는 '친절과 용서와 자비와 기쁨의 시간'이며, '굳게 걸어 닫았떤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을 무시하지 않고 '언젠가 늙으면 자신들처럼 땅에 묻히게 될 인생의 길동무'라고 여기는 시간입니다. 디킨스는 초기 자본주의 폐해를 치유하기 위한 해독제로 크리스마스 정신을 되살릴 것을 주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디킨스의 바람처럼 매일매일이 크리스마스와 같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요?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서부전선의 서북단 이프르(예페르)에서 디킨스가 꿈꾸던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서로 대립하던 독일군과 영국군이 총과 무기를 내려놓고 무인지대에 모여 술과 담배를 나누고, 방치됐던 시체를 거둬 장례식을 치뤄주고, 함께 축구를 하며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한 이런 평화운동은 서부 전선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비록 고위 군 지휘자들이 개입하며 관련 병사들은 모두 처벌되고, 그들은 다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어야만 했습니다만 크리스마의 기적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책으로 직접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텍스트에 흩어져 있는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아이들과 이 책을 함께 읽어 보며 크리스마스가 어떤 의미를 지닌 날인지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