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팬은 정말 순수의 상징인가요?
'피터 팬'을 아시나요?
흔히 '피터 팬'하면 빨간 깃털이 달린 녹색 모자를 쓰고 초록색 옷을 입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장난꾸러기 소년을 떠올립니다. 그에 맞서는 악당 후크 선장은 손에 쇠갈고리를 달고 부하들을 함부로 대하고 난폭한 인물이고, 네버랜드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모험을 즐길 수 있는 즐거운 놀이동산이라고 기억합니다. 줄거리 역시 피터 팬의 초대로 네버랜드로 여행을 온 웬디와 동생들이 힘을 합쳐 악당 후크 선장을 제거하고 다시 런던에 있는 집으로 복귀한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임스 배리의 원작 '피터 팬'을 읽은 아이들은 '피터 팬'이 버릇없고 막돼먹은 아이라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오히려 후크 선장이 교양이 있고 매력적인 인물 같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네버랜드가 가보고 싶을 정도로 멋진 곳인지도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평가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피터 팬'과 아이들이 읽은 '피터 팬'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피터 팬의 내용은 월트 디즈니가 1953년에 제작한 애미메이션 '피터 팬'에 근거하고 있거나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수많은 뮤지컬과 영화 등에서 영향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원전을 직접 읽은 아이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원전'과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뮤지컬, 축약본 등 '2차 창작물'은 등장인물은 물론 줄거리까지 유사할 뿐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피터 팬'은 디즈니에 의해 각색된 작품일 뿐이며 결코 제임스 배리의 '피터 팬'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피터 팬은 '순수한 동심'의 상징인가요?
피터 팬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자유분방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숨을 쉴 때마다 어른이 하나씩 죽는다는 말에 따라 의도적으로 더 빠르게 숨을 쉬는 피터 팬의 행동은 잔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항상 대장 노릇을 하려 들고, 사소한 잘못도 용서 못하는 잔인함은 오히려 피터 팬이 의외로 후크 선장과 공통점이 많다는 인상을 줍니다. 실제로 피터 팬이 후크 선장을 물리친 후 선장실에 앉아 후크의 담뱃대를 입에 물고 집게손가락으로 쇠갈고리를 만들어 위협적으로 흔드는 모습은 이 둘이 서로 분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피터 팬이 후크를 살해한 이유도 그들이 동시에 웬디를 대리엄마로 원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피터 팬의 지나친 잘난 척 때 문에 그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후크 선장은 부하들을 잔인하게 대하고 무자비하게 살해할 만큼 포악한 인물이지만, 명문 학교 출신인데다 귀족적 매너와 세련된 옷차림을 갖추고 웬디도 인정할 만큼 섬세하고 친절한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피터 팬과 후크 선장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와 달리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히려 이 둘은 명과 암이 혼재된 모호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버랜드 역시 모험과 환상으로 가득찬 나라는 아닙니다. 어른의 세계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 피터 팬은 '자라난 아이들은 규칙에 어긋난다고 솎아낸다'고 말하는데, 솎아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터가 웬디와 함께 아빠, 엄마 흉내를 내면서 아이들을 단속하고, 가정을 돌보는 장면은 그가 현실 세계의 규칙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역시 소설에서는 현실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가 명확하게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작품에 나타난 이러한 모호성 혹은 양가성은 좋은 문학의 전형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가 서로 대립하는 가치나 입장 중 어느 한 쪽만을 편들고 옹호한다면, 좋은 문학은 양립하는 대상들의 양가적 측면을 부각시켜서 읽는 사람이 반성해 보도록 합니다. 헨리 지루는 디즈니가 '순수함'을 가장해서 은밀하게 미국의 보수적인 중산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헨리 지루/성기완 번역, 디즈니 순수함과 거짓말, 아침이슬) 그에 따르면 디즈니의 '피터 팬' 역시 아동의 순수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남성 중심적 편견을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텍스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피터와 웬디의 부부 역할 놀이 역시 당시의 가부장적 문화를 답습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배리의 '피터 팬'은 다층적 구성으로 인해 독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웬디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 또 피터 팬의 폭력성이 비판적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웬디와 동생들을 중심으로 읽을 경우 이 책은 시련을 통해 용기, 명예, 책임감을 배워나가는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네버랜드를 찾아서
피터 팬은 자신의 부모가 '우리 애가 커서 무엇이 되면 좋을까'라는 주제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지도 않고 옛날 이야기도 들려 주지 않던 엄마가 진정으로 아들의 미래를 걱정해서 남편과 격렬하게 갑논을박을 펼쳤던 것일까요? 혹시 피터의 엄마는 자식을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성취시켜 줄 대리물로 여기고 벌써부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원치 않은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엄격한 훈육과 강압적 질서를 예상하고 피터 팬은 네버랜드로 떠났던 것은 아닐까요? 게다가 자신이 엄마의 욕망과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을 경우 감당해야 할 막대한 부담과 책임을 어린 피터는 두려워 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 결과 피터 팬은 엄마를 포함한 어른들을 증오하는 동시에 엄마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팅커 벨은 사실 웬디를 질투할 필요가 없었는데, '모성애'가 결핍된 피터 팬은 웬디를 '이성'으로 사랑할 만한 능력마저 박탈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웬디를, 그리고 그녀의 딸을, 또 그녀의 딸의 딸을 반복해서 네버랜드로 초대하겠지만 '연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엄마의 대리보충으로서만 소환할 뿐입니다. 그래서 피터 팬의 때묻지 않은 순수성은 자연스러운 성장을 거치지 못한 채 특정 발단 단계에 고착된 아이의 불완전한 순수함으로 느껴집니다. 네버랜드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젊게 사는 대가로 피터 팬은 부모의 따뜻한 온정과 여인과의 사랑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가 네버랜드에 머물기 위해 상실해야 했던 또 다른 대상은 기억력입니다. 그는 오랫 동안 함께 지낸 팅커 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죽인 후크 선장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심한 건망증을 앓고 있습니다. 씁쓸했던 추억만을 상기시키는 과거나 꿈꿔 본 적 없는 불안한 미래를 차단한 채 온전히 현재에만 머물기 위해서 망각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피터 팬과 네버랜드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마냥 귀엽고 행복해 보이는 어린이도 세상 살이가 녹록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유년기를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 단계 정도로만 여기고 아이들을 오직 공부에만 몰입시키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피터 팬'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 작품입니다. 아이들을 그토록 치열한 경쟁에 내모는 것은 과연 누구의 꿈을 위한 것인지, 진정 아이들을 위한 것은 무엇인지 치열하게 우리 사회가 고민해봐야 할 때입니다.
'학년별 책읽기 > 6학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지 오웰/김욱동 번역, 동물 농장, 푸른숲주니어 (1) | 2024.12.07 |
---|---|
손창섭, 싸우는 아이, 우리교육 (6) | 2024.12.06 |
구드룬 파우제방/함미라 번역,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보물창고 (5) | 2024.11.24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황현산 번역, 어린 왕자, 열린책들 (7) | 2024.10.11 |
마크 트웨인/지혜연 번역, 톰 소여의 모험, 시공주니어 (15) | 2024.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