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저명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이 우리는 소설을 왜 읽는가에 대해 답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그 까닭은 이야기는 금기에 의해 억압된 인간의 욕망을 변형시켜 드러낸 것이어서 사람들의 한없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욕망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소설은 그 어떤 다른 예술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그 욕망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설에는 다양한 욕망들이 충돌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에는 세계를 자기 식으로 변모시키려고 하는 '소설가의 욕망'이 있고, 소설가의 욕망에 따라, 혹은 그 욕망에 반대하여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욕망'이 있고, 그리고 소설가의 욕망과 인물들의 욕망을 부인하거나 모방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려는 '독자의 욕망'이 뒤엉켜 있습니다.
그래서 김현 선생님은 "소설은 소설가의 욕망의 존재론이 읽는 사람의 욕망의 윤리학과 만나는 자리"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를 다음처럼 요약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술 중에서, 소설은 가장 재미있게, 내가 사는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반성케 한다. 일상성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의 채찍과도 같은 역할을 맡아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김현, 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 문학과지성사)
소설을 읽는 이유와 목적은 개인마다 다양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혹은 오락적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소설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현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소설의 본질은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다양한 세상을 만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살 만한 곳인가 반성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소설 읽기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925년에 쓰여진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오늘날 우리 학생들이 읽는다는 것은 소설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삶과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반성하고 저 근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활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 읽기는 줄거리 읽기가 아니다
이 소설은 개츠비라는 남자와 데이지라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상술하자면, 가난 때문에 연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개츠비가 부정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부를 축적해서 옛 연인 데이지의 사랑을 되찾으려 했지만, 여자의 남편 톰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던 정부인 머틀을 살해한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결국 정부의 남편인 윌슨의 총에 맞아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하찮은 내용을 지닌 소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위대한 소설로 찬사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소포클레스의 위대한 비극인 <오이디푸스>도 아들이 아빠를 죽이고 엄마와 결혼한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작가 피츠제럴드는 아내와 편집자가 선택한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 대신 '웨스트 에그의 트리말키오'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웨스트 에그(West Egg)는 벼락부자가 된 신흥 부자들이 거주했던 뉴욕 롱 아일랜드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며 그곳에 개츠비의 저택이 있었습니다. 트리말키오는 로마 시대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돈 많고 천박한 부자를 뜻합니다. 작가가 의도했던 제목은 이 소설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소설의 화자인 닉이 동부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어딘지 모르게 뒤틀린 데가 있는' 인물들입니다. 톰은 괴물 같은 거대한 근육질의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빈곤한 인물입니다. 데이지는 매우 매력적이지만 속물적인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톰의 정부인 머틀은 사치와 허영심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테니스 선수 출신의 조던은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직'한 인물입니다. 모두가 물질적 풍족에 도취되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인간성마저 상실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물들과 주인공 개츠비가 구분되는 점은 무엇일까요?
소설의 화자인 닉은 개츠비에게서 "뭔가 멋진 구석"을 발견해 냅니다. 그에 따르면 개츠비는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과 "낭만적인 민감성"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썩어 빠진 무리들 속에서 유일하게 "부패하지 않은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닉에게 개츠비는 "스스로 만들어 낸 이상적인 모습에서 솟아 나온 인물"이자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소설의 독자들이 화자 닉의 진술에 의존해서 개츠비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닉은 개츠비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고 판단할 만큼 '믿을 수 있는 화자'인가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개츠비는 자수성가의 대명사인 프랭클린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금욕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는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열지만 술은 마시지 않으며 데이지 이외에 다른 여자들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부를 축적한 방식은 금욕적 실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법적인 밀주 거래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를 되찾기 위해 불법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은 개츠비를 왜 닉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일까요?
이처럼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된 사건을 요약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야기가 전달되는 기술적 방식이나 사건을 서술하는 작가의 문체 등 소설을 구성하는 형식적 요소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활동입니다. 특히 이 소설은 화자 닉에 의해 모든 사건이 전달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성격을 지닌 화자인지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츠비는 왜 데이지를 사랑했을까?
데이지는 본인 스스로 "닳고 닳은 여자"라고 평할 만큼 허영심으로 가득찬 속물입니다. 개츠비가 꺼내놓은 값비싼 셔츠를 보고 왈칵 눈물을 흘릴 만큼 천박한 욕망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개츠비조차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라고 인정할 만큼 물질적 욕망의 화신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를 개츠비는 왜 사랑했던 것일까요? 개츠비는 왜 결혼까지 한 그녀를 꼭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데이지는 상류사회에 속한 인물로 하층계급에 속한 개츠비가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우아한' 여자였습니다. 개츠비의 시선 속에서 그녀가 사는 집 주위에는 "무르익은 신비로움"이 감돌았고 "번쩍거리는 최신형 자동차처럼 신선하고 생기 넘치는 로맨스"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이미 많은 사내들이 데이지를 사랑했다는 사실 또한 그의 가슴을 더욱 설레게 했"습니다. 소설가는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진 순간을 왜 이렇게 서술하고 있는 것일까요?
학생들은 개츠비가 데이지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그녀가 속한 상류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그녀를 사랑한 것은 아닐까 의심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이미 많은 돈을 갖고 있는 개츠비가 왜 그녀에게 집착하는 지를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개츠비는 이미 충분한 돈으로 상류사회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츠비는 낭만적 성격을 갖고 있어 첫사랑의 그녀를 잊지 못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심지어 딸까지 있는 여자를 빼앗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등장인물 닉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합니다. "나는 그가 되돌리고 싶은 것이 데이지를 사랑하는 데 들어간, 그 자신에 대한 어떤 관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따르면 개츠비가 데이지와의 사랑을 되찾고 싶은 이유는 사실 데이지 자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열정적이고 순수하게 노력했던 과거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사랑을 되찾는다고 해서 과연 잃어버렸던 과거의 자신도 돌아오는 것일까요?
개츠비라는 인물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면서 우리는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됩니다. 사랑은 나에게 결핍된 무엇을 상대를 통해 채우려는 행위일 수도 있고,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충동이 발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상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상대를 열렬히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금기나 사회적 규범을 넘어서려는 무모한 열정일 수도 있습니다. 개츠비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인간의 내면 안에 우리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충동들이 들끓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대체 왜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우선 개츠비는 주변의 타락한 인물들과 달리 '낭만적'인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가 돈을 악착같이 모은 이유는 과거에 실패한 사랑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는 데이지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타락하고 속물적인 여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실패한 인물로 개츠비를 파악할 경우 그 앞에 붙은 수식어 '위대한'은 반어적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great'는 '대단한'으로 번역하는 게 보다 적절해 보입니다.
그런데 소설 말미의 서술은 개츠비의 '위대함'을 다르게 이해할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개츠비의 저택이 있던 자리는 옛날 네덜란드 선원들이 부푼 꿈을 안고 신대륙을 건너왔던 순간 그들이 처음으로 보았던 섬이 있었던 곳입니다. 개츠비가 데이지의 부두 끝에서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내고 느꼈을 경이감은 초기 개척자들의 그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작가는 개츠비를 1920년대 타락한 미국 사회가 잃어버린 최초의 순수했던 꿈을 환기시키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가 상실한 가치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개츠비의 위대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헝가리의 문학이론가 루카치는 소설이란 장르를 "문제적 주인공이 본래의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동경과 모험으로 가득 찬 여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게오르크 루카치/김경식 번역, 소설의 이론, 문예출판사) 개츠비는 일명 '재즈의 시대'이자 '광란의 시대'로 불리는 1920년대의 미국 사회가 번영과 환락이 극에 달해 있지만 실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신적으로 공허한 시대였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타락한 방법으로 타락한 세상과 싸우면서 순수함을 되찾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문제적 개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패배가 예고된 싸움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비극의 영웅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개츠비의 위대성은 자신만의 진실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도전한 용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설은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현실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주인공들은 꿈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비록 그 여행이 실패로 끝나고 자신의 목숨도 잃게 될 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지요.
개츠비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게 될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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