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4학년

한윤섭, 우리 동네 전설은, 창비

ddolappa72 2024. 7. 20. 20:56

 

 
 
고향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전설의 고향'을 기억하시나요?

 

어린 시절 너무 무서워서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눈만 빼꼼 내놓은 채 TV 브라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전설의 고향'입니다. 하얀 소복에 입가에 피를 묻힌 창백한 피부의 원귀나,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들의 간을 빼먹던 구미호의 빨간 눈은 방송이 끝난 후에도 어린 영혼의 꿈 속을 악착같이 찾아와 밤새 식은 땀을 흘리며 쫓겨 다녀야만 했습니다. 사실 '전설의 고향'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모두 귀신이나 요괴가 등장하는 호러 드라마는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은 전국 각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이야기들을 드라마로 각색한 것이었지만 그 중에서 유독 공포스럽고 충격적인 것들만이 어린 기억 속에 각인된 탓에 무섭다는 인상만이 남은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명 '내 다리 내놔' 에피소드는 가끔 인터넷에서 찾아볼 만큼 유독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박달산 지락에서 떠돌던 '덕대골 설화'로 제작된 방송인데 폭우가 쏟아지던 밤 다리 한 쪽을 잃은 귀신이 아낙을 뒤쫓아오는 장면은 지금 보더라도 모골이 송연합니다.

 

그런데 '전설의 고향'류의 공포 이야기와는 또 다른 성격의 괴담이 예전에는 많이 유행했던 듯합니다. 학교마다 정중앙에 늠름하게 서 있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밤만 되면 움직인다거나, 학교가 터한 자리가 원래 공동묘지여서 비 오는 밤만 되면 귀신들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학교 괴담도 심심치 않게 회자되곤 했습니다. 또 아직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기 전이라 제례식 화장실이 일반적이었던 시절 유독 화장실를 둘러싼 괴담들도 많았습니다. "빨간 휴질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묻던 귀신부터 자정 무렵 학교 화장실 문 앞에 칼을 입에 물고 물이 담긴 대야를 들여다 보면 미래의 배우자를 보여준다는 귀신까지 화장실은 '근심을 해소하는 공간'(해우소)이 아니라 당시 어린이들에게 '근심을 불러 일으키는 공간'였습니다.

 

그리고 사고로 인해 반인반묘가 된 홍콩할매가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골라 살해한다는 괴담이나, 찢어진 입을 빨간 마스크로 가리고 상대방에게 본인이 예쁘냐고 묻고 대답과 상관없이 상대방을 살해 한다고 알려진 빨간 마스크 괴담은 당시 초등학생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전설의 고향'과 '홍콩할매 귀신'이 주는 공포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전설의 고향' 속 이야기는 대부분 아무리 무서워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 '홍콩할매 귀신' 류의 도시 괴담은 도시 사람들에 의해 제작, 유통된 이야기로 무차별적인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킬 뿐입니다. 최근 아이들이 이런 도시 괴담을 '신비 아파트'에서 본 적이 있다고 할 뿐 독자적으로 생산된 특별한 괴담을 모른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예전에 유행하던 도시 괴담은 그 당시 불안한 사회상이 반영된 이야기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설이 있는 곳이 고향이다

 

제가 서두에 전설과 괴담을 길게 언급한 이유는 그것이 한윤섭 작가가 자신의 고향을 기억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병을 낫기 위해 아이들을 붙잡아 간을 빼먹는다는 할머니가 있는 '방앗간', 비만 오면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뱀산', 일제 시대 때 잡혀간 남자가 아카시아꽃을 따 먹고 웃으며 서 있다는 '아카시아길' 등 득산리 곳곳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전설로 가득합니다. 작가는 목사인 아빠를 따라 시골마을로 전학을 오게 된 도시 소년 준영이의 시선을 통해 고향 전체를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재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마치 '전설이 있는 곳이 고향이다'라고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도시나 서울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고향은 명절 때 부모님을 찾아 뵙기 위해 내려가는 곳이 되었거나 저출산으로 인해 소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로 인해 '고향'이란 말은 슬프게도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향땅의 특색있는 정경이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그들의 기억 속에 간직된 고향에 대한 '전설'도 함께 사멸해 버리게 되고, 그로 인해 '고향'이란 말은 알맹이는 빠진 채 껍데기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개별화된 특성이 사라진 정형화된 도시 공간은 그 누구도 와서 살 수 있지만 고유한 개별성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고향'으로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단지 거쳐가는 환승지로만 여기는 분위기에서 다음 세대에 전달될 만한 추억이나 이야기도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업에서는 아이들에게 살고 있는 지역에 떠도는 이야기를 묻거나, 특별한 기억이 담긴 장소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합니다. 아이들이 본인들이 사는 곳을 '장소'가 아니라 '공간'으로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들 때 즉, 공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그곳은 '장소로 발전'한다"고 이-푸 투안은 말합니다.(이-푸 투안/윤영호, 김미선 번역, 공간과 장소, 사이) 친구들과 '몰땅'을 하던 놀이터, 짝사랑하던 여학생한테 초코릿을 건내주고 도망쳤던 분식점 앞, 학원을 땡땡이 치고 친구들과 모여서 수다를 떨었던 근린공원 등도 켜켜이 시간의 더깨가 쌓여서 추억이 되면 '공간'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책은 기억과 기억을 잊는 매개체입니다

 

아이들은 돼지 할아버지의 밤밭에서 밤을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고, 도둑질은 나쁜 짓이 아니냐고 묻곤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서리'라고 알려 줍니다. 따지고 보면 서리도 주인 모르게 참외나 사과 따위를 훔쳐서 먹는 행위이지만 지역 사회에서 묵인된 도둑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던 가난한 시절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그렇게 굶주린 배를 잠시나마 채울 수 있었고, 너나없이 알고 지내던 마을 공동체에서 그정도의 일탈은 암묵적으로 용납해 주었던 것입니다.

 

'서리'에 담긴 이런 정서적 배경을 이해하고 있어야 아이들을 뒤쫓던 돼지 할아버지가 울타리 가까이에서 멈춰 서서 돌아간 이유를 납득할 수 있습니다. 단지 할아버지가 기운이 없어서거나 아이들과 장난 치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이 아니라 혹시 아이들이 다칠까 염려하는 따뜻한 배려가 그 행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체를 닦는 행위인 '염'이나 관을 무덤으로 옮길 때 사용한 상여를 보관한 '상엿집' 등도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책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쌓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상여 나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어떤 방식으로 장례가 이루어 졌는지 설명하기도 합니다. 단어의 뜻은 물론 그것에 담긴 정서적 의미까지 알고 있어야 작품에 대한 온전한 감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아이들을 어떻게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교재로 골랐던 이유는 단순히 아이들에게 '전설의 고향' 같은 세계를 맛보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가가 '전설'을 단순히 공포담으로 소비하지 않고 고향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활용한 점도 좋았고, 또 그것을 도시에서 온 소년이 시골마을 아이들과 친해지는 매개체로 사용한 점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아이들이 꼭 읽었으면 했던 이유는 자연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풍경 묘사를 읽다가 문득 이 사람은 틀림없이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던 장면들이 있습니다.

 

(가) 과수원의 복숭아나무들은 이제 이파리들만 남아 있었다. 그중에는 벌써 잎을 반쯤 쏟아 낸 나무도 있었다. 멀리 노란 들판에도 군데군데 추수를 한 논들이 보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준영은 그 노란 풍경 속에서 가을이 아닌 또 다른 계절을 보았다. 그건 겨울이었다. 노란 가을 사이사이에 벌써 겨울이 들어와 있었다. 그냥 평범하기만 한 들녘에서 가을과 겨울이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특이한 광경이었다.

 

(나) 준영은 잔뜩 긴장을 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툭, 툭, 툭, 툭' 또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 소리가 평상 아래 준영의 발밑에서 들려왔다. 준영이는 눈을 뜨고 아래를 보자, 윤기 나는 밤알 하나가 발 옆에 떨어져 있었다. 그제야 준영은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바로 밤알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가을 내내 아람 불었던 밤들이 새벽이슬에 미끄러져 낙엽 위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예를 들어, 노랗게 물든 가을 들판에 숨어 있는 겨울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오래 시간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기 힘든 경험입니다. 또 사위가 고요한 이른 새벽에 툭툭 떨어지며 내는 청명한 밤알들의 합창 소리 역시 상상으로만 쓸 수 없는 글입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작가의 이력을 찾아 보니 역시나 이 책의 배경이 되는 득산리가 한윤섭 작가의 고향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성장하다 보니 계절의 변화에 둔감하고, 자연이 주는 오묘한 깨우침에 무심한 아이들한테 이런 구절을 읽는 것만으로도 진귀한 경험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은 아이들한테 영원히 놀이터이자 교실로 남을 것입니다. 자연이 제공하는 수많은 것들이 모두 아이들에겐 경이로운 놀이감이자 지혜로운 친구들입니다. 해외로 여행은 떠나 호텔 방에만 있다온 아이보다 외할머니 댁 주변의 산천을 헤매며 뛰어놀다 온 아이가 더 할 말이 많았던 것도 아마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연과 어떻게 만나게 해야 할 지 어른들이 더 많이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