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4학년

위다/노은정 번역, 플랜더스의 개, 비룡소

ddolappa72 2024. 8. 9. 23:13

 

 

 

아무도에게도 이해 받지 못한 어린 영혼의 죽음

 

 

파트라슈를 아시나요?

 

어린 시절 친구들과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주인공 네로와 파트라슈의 아름다운 우정에 가슴이 뭉클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회에서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그림을 마침내 보고는 파트라슈를 꼭 끌어 안고 죽던 장면은 아마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제 영혼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가수 이승환이 '프란다스의 개'라는 노래를 발표했을 때도 옛 친구를 재회한 듯 반가웠습니다. 만화영화의 주제곡을 그대로 따라하는 첫 부분은 갑자기 시간을 어린 시절로 되돌려 놓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그 뒤 지금은 세계적 영화 감독이 된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2000)라는 영화로 장편 데뷔했을 때도 무엇에 홀린 듯 극장을 찾아가 영화를 관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과 가요와 영화의 원작이 되는 작품을 직접 찾아서 읽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굳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직접 찾아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였겠지요. 원작 '플란다스의 개'는 1972년 영국 작가 마리아 루이즈 라메(Maria Louise Rame)가 ‘위다(Ouida)’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입니다. 막상 원작을 읽고 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네덜란드풍 의상을 입고 있던 네로와 아로아가 사실 벨기에의 플랜더스 지방에 살고 있던 15세 소년 '넬루'와 12세 소녀 '알루아'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알루아의 아빠 코제 씨가 딸이 넬루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경계했던 까닭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늘어가는 이기적인 만남에 / 한 번쯤은 생각하지 그 개 파트라슈'라는 이승환의 노래 가사처럼 흔히 이 소설의 주제를 소년과 개의 우정으로만 생각해왔는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그것이 맞는 지 의심해 보게 됩니다. 원작은 '사랑에 대한 보상도 없고 믿음 또한 실현죄 않는 세상'에서 '세계 전체가 등을 돌리는 호된 시련'을 겪는 한 소년의 혹독한 운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넬로가 크리스마스 전날 루벤스의 그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를 보고 죽는다는 설정이나, 원작의 부제가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것은 작가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겨우 15세밖에 안 된 소년에게 작가가 너무 가혹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전체가 등을 돌린 시련'이라니요!

 

안트베르펜 성모 대성당에 있는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넬로는 이 그림을 본 후 숨을 거두었다.

 

 

 

넬로는 왜 화가가 되고 싶었을까

 

넬로의 할아버지 예한 다스는 넬로가 땅의 지주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나리'라고 불리길 원했습니다. "네가 어른이 되어 이 오두막과 손바닥만 한 땅덩이라도 갖고 밥벌이를 하며 이웃들에게 '나리'라고 불린다면, 나는 무덤에 가서도 아쉬울 게 없겠구나."

 

하지만 넬로는 할아버지의 소망과 '다른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넬로는 남들이 함부로 얕보지 못하도록 '위대한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위대한 사람'이란 화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넬로는 위대한 화가는 "왕의 권력마저 뛰어넘는 불멸의 힘을 가진 부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넬로의 꿈은 코제 씨 같은 사람에 의해 비웃음을 살 뿐이었습니다. "그 녀석은 가진 거라고는 없는 거지일 뿐이야! 화가가 되려는 헛된 꿈을 가졌으니 오히려 거지보다도 못하지."

 

과연 넬로와 코제의 주장 중 누가 맞는 것일까요? 넬로의 말처럼 화가는 왕의 권력마저 뛰어넘는 힘을 가진 존재인가요? 그리고 넬로는 그런 화가가 실제로 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넬로는 코제의 말처럼 가난뱅이 주제에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영국의 작가 위다가 작품의 배경을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루벤스의 고향 안트베르펜으로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루벤스가 잠들어 있는 이 도시는 여전히 그 한 사람을 통해 살아서 다가옵니다. (....) 루벤스가 있었기에 이 도시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이름이 되고, 신성한 곳이 되었습니다. 예술의 신이 빛을 본 베들레헴이자, 예술의 신이 잠든 골고다가 되었습니다. (...)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여! 그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귀하고도 귀하게 여기세요. 오직 그 인물들을 통해서만 미래가 그대의 나라를 기억할 테니까요." 작가는 루벤스가 태어나고 묻힌 안트베르펜을 마치 예수의 베들레헴과 골고다처럼 신성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넬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그림인 '십자가에 들려 올려지는 예수'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가 이 도시의 성당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에서 작가가 루벤스와 예수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넬로가 위대한 루벤스의 영혼을 물려 받은 아이일 지 모른다고 암시해 놓고 있습니다. 실제로 별다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넬로는 단번에 미술대회에 우승할 만큼의 놀라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넬로의 예술적 재능은 척박한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고 맙니다.

 

"그림을 보여 주지 않다니 정말 너무해. 가난해서 돈을 낼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볼 수 없다니! 그분이 저 그림을 그리셨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않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을 거야. 난 믿어. 그분이 계셨다면 언제든 매일매일 우리가 그림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을 거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림을 천으로 가려 두었어. 캄캄한 어둠 속에 저 아름다운 그림을 가둬 두다니! 저 그림은 부자들이 와서 돈을 내야만 빛을 볼 수가 있어. 게다가 아무도 그림을 돌보지 않아. 난 저 그림을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은데 .... "

 

넬로는 위대한 예술작품을 교회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현실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마음껏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부자들은 돈으로 모든 가치를 환원하기 때문에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넬로의 입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훗날 루벤스만큼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을 지도 모를 어린 예술가가 루벤스 고향 사람들의 무지와 멸시 속에 죽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쁜 날에 넬로가 교회에서 얼어 죽어야 하는 비극적 상황과 포개집니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지만 정작 예수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는 사람들과 위대한 예술가의 고향인 것을 자랑하지만 정작 어린 예술가의 싹은 짓밟아 버리는 매정한 사람들. 그런 점에서 넬로가 고향에서 받아야 했던 수난은 예수의 수난과 겹쳐 집니다. 넬로가 죽기 직전 보았던 루벤스의 그림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인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넬로는 "마침내 그림을 봤어! 오, 하느님! 이제 됐습니다!"라고 나직이 외치고 죽음을 맞습니다. 그의 곁에는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파트라슈만이 있었습니다. 파트라슈는 넬로 못지 않게 끔찍스런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네 발 달린 짐승 중에서 가장 인내심 강하고 일 잘하는 짐승에게 플랜더스 사람들이 주는 품삯이라고는 고통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고통을 알아 보고 서로에게 의지했기에 그들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춥고 외롭고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을 때 곁에 있어 주는 이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앤트워프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앞에 자리하고 있는 잠자는 네로와 파트라슈의 조형물 : 출처 뉴스1

 

누가 넬로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을까

 

넬로에게 풍차 방앗간에 불을 질렀다는 누명을 씌운 코제 씨, 코제의 눈치를 보며 넬로를 외면한 마을 사람들, 미술 대회에서 넬로 대신 부잣집 아들을 1등으로 뽑은 미술대회 심사 위원, 크리스마스 전날 방세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넬로를 집에서 내쫓아 버린 집주인 구두장이 중에서 누가 넬로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처음에 코제 씨의 잘못이 크다고 지적합니다. 그가 억울하게 넬로에게 누명을 씌우지만 않았어도 마을 사람들이 넬로를 외면하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불평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해서 한 마디 변명조차 하지 않은 네로는 전혀 잘못이 없는 것일까요? 네로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면 마을 사람들 중에서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코제를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옳지는 않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딸 알루아가 걱정되어 넬로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 했을 뿐입니다. 심지어가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넬로를 멀리하라고 명시적으로 지시를 내린 적도 없습니다. 그의 잘못이 있다면 딸에 대한 삐뚫어진 사랑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마을 최고의 권력자인 코제의 눈 밖에 나는 게 좋을 게 없기 때문에 코제의 심기를 거슬르지 않기 위해 넬로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넬로의 딱한 사정과 그의 착한 심성을 고려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코제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넬로를 보호해 주었더라면 과연 넬로가 죽었을까요? 아무리 코제라 해도 마을 사람들이 단합해서 넬로를 옹호했더라도 생각을 고쳐 먹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겨우 15살인 소년을, 그것도 고아나 다름없는 가난한 소년을 마을의 권력자가 괴롭히려 든다는 인상을 마을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이 자신의 평판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미술대회 심사위원들이 정당하게 넬로의 그림을 1등으로 뽑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넬로는 상금으로 빚을 청산하고, 자신의 꿈인 화가가 되어 파트라슈와 행복하게 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넬로가 크리스마스 전날 성당으로 간 것도 그날에만 무료로 개방된 루벤스의 그림을 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유일한 희망이었던 미술대회에서의 입선이 좌절된 탓이 큽니다. 꿈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면 넬로는 결코 쉽게 죽음을 결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끝으로 코제와 친한 집주인은 수 개월간 방세를 못 내는 넬로를 하필 크리스마스 전날에 내쫓았다는 게 문제가 됩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유럽의 문화에서 볼 때 집주인은 거의 악마나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가난한 과부나 고아를 돌봐 주어야 한다는 예수의 요청이 그에 의해 보기 좋게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에 어린 소년을 집에서 내쫓은 것은 직접적인 사형선고에 다름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들 중 과연 누가 넬로가 죽음에 이르게 된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런 질문에 대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 '플랜더스의 개'는 오늘날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수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지는 않을까요? 그리고 과연 우리는 넬로와 같이 재능있는 어린 영혼을 편견과 잘못된 생각으로 죽이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네 안에는 살해된 어린 모차르트가 있다'고 경고했던 생텍쥐페리의 외침이 '플랜더스의 개'에서도 환영처럼 메아리치고 있진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