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2

오비디우스/이윤기 번역, 변신이야기1, 민음사(2)

ddolappa72 2024. 9. 8. 14:08

벨라스케스, 실잣는 여인들, 220x289cm 1657년 경. 프라도 미술관

 

신에게 도전한 아라크네

아라크네는 자신의 베짜기 실력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신 앞에서조차 자신의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을 만큼 기계가 강한 인물입니다. 아라크네의 오만한 태도는 배짜기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팔라스 여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둘은 배짜기 최강자를 놓고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우선 팔라스 여신은 아테네 도시를 놓고 넵투누스 신과 경쟁해서 자신이 승리를 거둔 모습을 담고 있는 문양을 수놓습니다. 베의 네 귀퉁이에는 신들과 경쟁을 하다 벌을 받은 인간들의 최후를 짜 넣습니다. 팔라스 여신은 이런 문양을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며 자신에게 감히 도전한 아라크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와 달리 아라크네가 짠 문양에는 유피테르, 넵투누스, 포에부스 등 남성 신들이 인간 여성들을 부도덕하게 차지하고 있는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이를 보자마자 팔라스 여신은 분노가 치솟아서 대결의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아라크네의 직물을 찢어버리고 맙니다.

팔라스 여신이 분노한 까닭은 남신들의 부도덕을 고발하면서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아라크네의 당돌함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게다가 팔라스는 유피테르의 총애를 받는 딸로서 가부장제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신의 권능과 질서에 도전하는 아라크네에게 즉결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작가는 아라크네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먼저 이 이야기는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오만함을 ‘휘브리스’(Hybris)라 부르며 수많은 서사시와 비극의 주제로 삼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라크네는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녔어도 신 앞에서 겸손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또다른 의문을 낳습니다. 만약 재주를 과시한 아라크네의 오만함이 문제라면 왜 팔라스 여신은 아라크네가 그 재주를 다시는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일까요? 거미로 변신해서도 아라크네는 얼마든지 신들을 비난하는 문양을 짤 수가 있을 텐데 말이죠.

또다른 관점에서 이 이야기는 비록 신에게 저주를 받았지만 그에 굴하지 않은 예술가의 올곧은 도전 정신과 드높은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오비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눈 밖에 나서 추방을 당했지만 예술가로서 긍지를 잃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 안의 미노타우로스

미노스 왕은 넵투누스 신에게 잘생긴 황소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덜 잘생긴 황소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로 인해 화가 난 넵투누스는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가 잘생긴 황소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만듦으로써 복수를 했습니다. 따라서 미노타우로스는 파시파에의 부도덕한 성욕과 미노스의 그릇된 소유욕이 합쳐져 탄생한 괴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뒤틀리고 파괴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괴물입니다.

그런데 미노스 왕은 왕비의 부정으로 태어난 괴물을 죽이는 대신 미궁에 가두는 결정을 내립니다. 장성한 괴물을 죽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그런 괴물마저 자신의 자식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괴물을 낳은 잘못이 과연 아내 파시파에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직접적인 원인 제공은 미노스 왕이 넵투누스와의 약속을 어기면서 제공한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미노스 왕은 자신의 잘못과 그릇된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신 명장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을 만들도록 명령해서 괴물을 깊숙한 곳에 봉인하고 감추어두는 해결책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노스 왕은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아테네에게 매년 젊은 처녀와 총각을 각각 일곱 명씩 보내라고 요구했고, 그들을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주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미궁 속에 감추어둔다고 해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드러나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미궁은 인간의 어두운 충동과 욕망이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희생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테세우스는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 미노스로 오게 됩니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 괴물을 무찌를 수 없었던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테세우스가 미궁을 탈출할 수 있도록 한 아리아드네의 명주실은 무엇을 상징한 것일까요? 다시 말해 인간의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욕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혹자는 그것이 이성의 끈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이성을 포기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판단을 내리면 내면의 미로에 갇혀 길을 잃지는 않게 될 거라고 합니다. 또 혹자는 아리아드네가 건낸 붉은 실은 사랑의 힘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동물적 욕망을 상징하는 미노타우로스는 아리아드네가 상징하는 인간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힘을 통해 순치되어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루벤스, 이카루스의 추락, 1636년, 프라도 미술관



다이달로스는 어떻게 미궁을 탈출할 수 있었을까?

한편 아리아드네에게 미궁의 비밀을 발설을 한 다이달로스는 자신이 설계한 미궁에 갇히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는 테세우스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미궁을 탈출합니다. 그는 문제를 3차원에서 해석해서 하늘을 날아서 탈출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같은 문제라도 관점에 따라 다른 해결 방식이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반면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달리 너무 높게 태양 가까이 날아오른 그의 아들 이카루스는 날개를 붙인 밀납이 녹으면서 바다에 빠져 죽고 맙니다. 이것은 과도한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너무 낮지도 그렇다고 너무 높지도 않은 ‘중용’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탈출에 실패한 이카루스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오르려는 태도는 청춘의 상징이기도 하니까요.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중용의 태도를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젊은 시절 이카루스처럼 왕성한 혈기로 수많은 실패와 실수를 해보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실패가 두려워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보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도전해 보려는 젊은이가 더 아름답지 않나요?

들라크루아, 격노한 메데이아, 1838년, 루부르 박물관



사랑스러운 악녀들

메데이아는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서 희대의 악녀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황금 양털을 훔쳐 달아나는 자신을 추적하는 아버지를 따돌리기 위해 남동생을 죽여 토막을 낸 뒤 바다에 던져 버리기도 했고,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이손의 숙부 펠리아스를 그의 딸들을 속여 잔인하게 살해하도록 만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 결과만 보고 그녀를 악녀로 평가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조국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던 사회적 ‘타자’였고, 남성들이 지배하는 가부장적인 사회의 ‘희생자’이기도 했습니다. 남동생과 펠리아스를 살해한 것은 남편 이아손을 돕기 위한 행동이었고, 이아손의 새 아내와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것은 이아손의 배신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메데이아의 이름은 ‘계획하는 자’라는 뜻으로 그녀의 진정한 무서움은 잔인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그녀의 영리함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조국을 침입한 미노스 왕을 일방적으로 사랑하게 된 스퀼라는 사랑 때문에 조국을 배반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인간은 누구나 저 자신의 신이 되어 저 자신의 뜻을 집행해야 된다’라고 정당화합니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사람은 누구나 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미노스 왕은 그런 스퀼라를 버리고 떠나버리고 맙니다. 스퀼라는 떠나는 미노스의 배를 보고는 무작정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쫓아가고자 합니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증오해도 나는 그대를 따라갈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선택에 추호의 후회도 하지 않고, 설령 배신을 당했다 해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도전하는 인물입니다. 이런 여성이 영웅이 아니라면 또 누가 영웅이 될 수 있을까요?

메데이아, 아리아드네, 스퀼라는 모두 사랑에 눈이 멀어 조국과 아버지를 배반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은 여인들입니다. 어찌 보면 모두 어리석은 여성들이고, 전통적으로 이성 대신 감정에 따르는 여성의 취약성을 노출시킨 사례들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메데이아의 도움 없이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요? 아리아드네의 조언 없이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제거하고 무사히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요? 스퀼라의 조력이 없었다면 미노스 왕이 과연 알카토오스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오비디우스는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쓸 만큼 사랑을 높게 평가하고 칭송한 시인입니다. 그가 과연 사랑의 어리석음을 경고하기 위해 그녀들을 사례로 들었을까요?

오히려 그녀들은 남자들보다 먼저 사랑했고, 사랑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했고, 남성들이 부담스러워할 만큼 뜨겁게 사랑했고, 그녀들의 저돌적 행동은 가부장적 질서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들로부터 버려진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그녀들은 남성 영웅들에 짝을 이루는 여성 영웅들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에뤼식톤

에뤼식톤은 신들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나무를 베지 못하고 망설이자 직접 도끼를 손에 들고는 정말 나무에 여신이 깃들어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쓰러뜨리고 맙니다. 케레스 여신은 자신이 아끼던 신목(神木)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자 분노한 나머지 그에게 '기아(飢餓)'의 여신 파메스를 보내게 됩니다. 파메스 여신의 저주로 인해 아귀병(餓鬼病)에 걸린 에뤼식톤은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시장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채워질 줄 모르는 그의 위장은 자신의 전 재산을 바닥나게 했고, 심지어 둔갑에 능한 딸을 이용해 음식값을 벌게 해 허기를 채우다가 마침내 지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고 죽게 됩니다.

우리 시대에 에뤼식톤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김영덕 교수는 저서 <에리식톤 콤플렉스>에서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세계 10대 경제대국임에도 돈과 물질적 재화를 향한 끝없는 욕망으로 여전히 배고파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에리식톤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돈과 재화에 대한 무한한 욕망으로 인해 환경은 물론 자신들마저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걸신에 들린 에뤼식톤이 재능 많고 사랑스러운 딸마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전락시켰듯이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우리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속박하고 구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