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2

오비디우스/이윤기 번역, 변신이야기1, 민음사(1)

ddolappa72 2024. 9. 8. 13:53

 

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공부해야 하나

나이키, 베르사체, 에르메스, 스타벅스의 로고 등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목성의 위성들로 알려진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네,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상표들이나 천체의 이름들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것들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미네르바의 올빼미, 트로이의 목마 등 수많은 시사 용어들이나 무수히 많은 문학 작품이나 철학, 미술, 음악, 영화 등이 전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것들입니다. 아니, 그리스 신화가 서구의 문명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근대 이후 서양 문명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의 정신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리스 로마 신화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그리스 신화는 대개 초등학생 때 한 번 읽어 보면 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초등학생들은 신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으로 신화를 안다고 착각하고,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신들의 이름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화를 해석해서 그 안에 담긴 정신적 알맹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이름을 가진 단독 저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히 토마스 불핀치가 여러 고전에서 짜깁기해 놓은 책을 읽고 그리스 신화를 전부 알았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리스의 신들에 관한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아폴로도로스의 '신화집', 그리고 오비디우스의 '변신' 등에서 언급된 것들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어렵더라도 신화를 다룬 원전에 도전해 본 후에 이윤기, 김헌, 강대진 선생님 등이 쓰신 책들을 참고해서 신화를 공부해 가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서양 문화의 두 기둥

서양의 문화를 형성하는 두 기둥은 흔히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ism으로 불리고,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성서는 두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차이는 창조 이야기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수업에서는 '변신 이야기'와 성경에서 창조를 다룬 부분을 비교해서 읽고 그 차이점을 찾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먼저, '변신 이야기'는 '카오스Chaos' 상태에서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성서는 조물주가 무의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전합니다. 즉,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반면, 성서를 기록한 유대 민족은 신만이 무의 상태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변신 이야기'는 창조를 뒤섞인 상태에서 요소들을 구분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활동으로 이해합니다. 창조란 무엇인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아니라 경계를 짓고 질서를 부여해 조화로운 상태로 만드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반면 성서에서는 창조의 도구로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조물주는 ‘말씀’을 통해 천지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언어’에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력이 있다고 생각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변신 이야기'와 ‘성서’의 또다른 결정적 차이점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다양한 신들이 등장하는 반면(다신론), ‘성서’에는 단 하나의 신만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유일신론).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사유 방식들이 서로 경쟁하고 보완하면서 만들어 나간 것이 서양의 문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역사나 문화 속에서 이런 생각들이 어떻게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 그들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편일 수 있습니다.


제우스는 바람둥이인가?

그리스-로마 신화는 가부장적 잔재 때문에 최근 페미니즘 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격받고 있습니다. 현대의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부도덕하고 남성중심적인 신들의 행태를 굳이 학생들에게 읽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토론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그리스-로마 신화가 지닌 그런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동해서 그리스 반도와 지중해 지역에 살던 원주민을 지배하는 과정이 반영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비나 번개 등을 다루던 날씨의 신에 불과했던 제우스가 점차 여러 지역 신들의 특성을 흡수하게 되면서 최고의 신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인들의 가족 제도인 가부장제에 따라 신들의 관계가 정리되면서 신화에는 강한 가부장제적 특성을 띠게 됩니다.

따라서 유피테르가 바람둥이로 묘사되고 있는 까닭은 단순히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반영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피테르의 바람기를 반드시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다시 따져봐야 합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도 호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펼쳐서 무려 29명이나 되는 호족의 딸들을 아내로 얻었지만 그를 바람둥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마찬가지로 유피테르의 바람기는 핏줄로 연결된 협력자를 다수 배출해서 안정된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는 고도의 정치술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우스는 모든 권력을 독점하려고 했던 크로노스와 달리 형제들과 권력을 분할하는 합리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습니다.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인 올륌포스 신들은 아버지가 이끌던 타이탄들과 전쟁인 '티타노마키아(Titanomachy)'에서 승리를 거둔 후 하늘은 자신이 통치하고, 지하 세계와 바다의 왕국은 각각 하데스와 포세이돈에게 맡겨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권력이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아폴로와 다프네, 대리석, 높이 243㎝, 로마 보르게제 갤러리


아폴로와 다프네에게서 배우는 진정한 사랑

현대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가 착용하는 월계관은 사실 그리스의 파티아 제전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올리브 나무로 만든 월계관을 씌어주던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이 월계관에는 포에부스(아폴로)와 다프네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포에부스에게 쫓기던 다프네가 강의 신인 아버지 페네이오스에게 기도하자 월계수로 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건의 발단은 포에부스가 퓌톤이라는 큰 뱀을 제거한 뒤 의기양양한 채 쿠피도를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에 있습니다. 이에 분노한 쿠피도는 상대를 사랑하게 되는 금화살은 포에부스에게, 상대를 싫어하게 되는 납화살은 다프네에게 쏘게 됩니다. 그래서 포에부스는 사랑에 눈이 멀어 다프네를 뒤쫓게 되고, 다프네는 포에부스의 그런 일방적 사랑을 질색하며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금화살과 납화살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소 자신이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말을 자주하는지, 아니면 상대에게 혐오와 불쾌감을 유발하는 말을 자주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신탁을 내리는 신인 포에부스도 왜 자신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랑이 신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사건임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한편 다프네는 ‘선머슴 같은 딸’로 영원히 처녀로 남길 원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변화를 원치 않는 인물임을 말합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사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촉매로 작용하는데, 사랑을 거부하는 다프네는 곧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때에 맞게 학교도 가고, 직업도 얻고, 결혼도 하지 않을 경우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다프네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랑을 상대를 향한 불타는 마음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요? 혹은 나는 너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냐고 묻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요? 포에부스와 다프네의 비극적 사랑을 통해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라바조Caravaggio, <나르시스Narcissus>(1597-1599, 110x92cm)


에고이스트는 사랑을 할 수 없다

나르키소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나르시시즘Narcissim’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빼어난 외모를 갖고 있었지만  과도한 자기애, 자기 중심적 성격, 타인을 무시하는 태도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나르시스트에게 주변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직 자신만이 관심의 대상입니다. 이 사실을 간파했던 화가 카라바조는 그래서 나르키소스 주변을 온통 까만 어둠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남겼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나르키소스를 보고 에코가 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도 가지고 있었던 에코는 그 수다 때문에 유노(헤라)의 저주를 받아 자기가 들은 말의 마지막 구절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지독한 나르시스트였던 나르키소스는 본체만체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계속 여위어가다가 아름답던 에코의 육신은 한줌의 재로 변해 바람에 날려가고 그녀의 목소리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오비디우스는 에코와 나르키소스를 한데 묶어서 이야기를 했을까요? 저주 받기 전 수다스러웠던 에코는 타인과의 소통이나 친밀감을 위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놓을 수 있는 상대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코 역시 나르키소스와 마찬가지로 자기 중심적인 에고이스트였던 것입니다. 나르키소스와 에코는 다른 사람은 배제한 채 자기 자신에 도취된 사람들로 사랑이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맺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에고이스트였던 그들이 타인과 참다운 사랑에 빠지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로 인해 신들의 저주를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비디우스는 왜 이 책을 썼을까?

이 책의 저자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다스리던 당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흑해 연안으로 추방됩니다. 그가 추방되기 직전에 완성한 작품이 바로 '변신 이야기'입니다. 15권의 서사시 형식으로 된 '변신 이야기'는 천지창조 때부터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군림하던 당대에 이르기까지 약 250편의 변신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이 책은 오비디우스가 추방을 면하기 위해 황제 아우구스투스 찬가를 쓴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비디우스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신들은 정의와 질서의 수호자라기보다는 황제가 그토록 강조하던 미풍양속을 해치는 주범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악타이온 이야기나 아라크네 이야기는 권력으로부터 부당한 처벌을 받은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악타이온은 우연히 디아나 여신이 목욕하는 모습을 엿보았다가 사냥개에게 쫓겨 몸이 찢겨 죽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악타이온, 디아나 여신, 사냥개들이 각각 어떤 인물들을 상징하고 있는지 유추해보도록 합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지닌 작가의 비판적 의도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우연히 권력자의 치부를 목격한 인물인 악타이온, 자신의 부정을 목격한 자를 잔인하게 응징하는 권력을 상징하는 디아나 여신, 그리고 전에는 친밀하게 지내고 심지어 찬양까지 했던 사람들이 상황이 바뀌자 순간적으로 돌변해 상대를 잔혹하게 비판하고 외면하는 파렴치한 모습들. 

신화 공부를 단순히 신들의 이름을 암기하는 것으로 알았던 아이들은 신화를 해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봄으로써 신화가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들로 고민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화는 현재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과거의 지혜가 응축된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