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1

사마천/전호근 옮기고 씀,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 메멘토

ddolappa72 2025. 9. 13. 21:16

 
사마천은 왜 평범한 사람들을 역사의 무대 위에 세웠을까

사마천의 <사기>는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기전체(紀傳體)' 방식을 정립한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조선의 5대 왕 문종 때 완성된 <고려사> 등도 사마천을 모범으로 삼아 쓰여졌습니다. 이 책은 본기(本紀) 12편, 표(表) 10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 등 전체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열전에는 도덕적 당위와 물질적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인간 군상의 생생한 모습이 담겨 있어서 오늘날까지 인생과 처세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기열전'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사마천은 왜 플루타르코스처럼 위대한 성인들과 영웅들 대신에 하찮은 사기꾼이나 노름꾼, 무명의 자객, 심지어 기이한 방식으로 돈을 번 부자 등 평범한 사람들을 선택해 역사 기록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일까요? 그는 왜 역사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일어난 사건을 정리는 방식('편년체(編年體)')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야기 형식('전(傳)')을 취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아내려 했던 것일까요? 혹시 이것은 그가 역사는 소수의 영웅호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욕망과 의지에 의해 운행된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그는 역사라는 시간을 온몸으로 살아냈던 평범한 삶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존엄과 고귀함을 후세인들이 '느껴보도록' 하기 위해 역사에 이야기 형식을 차용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반면, 시는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의 법칙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을 이야기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지만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의 경우처럼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했을 경우 그것은 역사일까요 아니면 시(문학)일까요? 사마천이 이러한 글쓰기 방식을 선택한 것은 그가 실제로 일어난 개별적 사건 속에서 어떤 보편적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예를 들어 고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왕은 진나라의 시황이었지만, 그 나라를 15년만에 무너뜨린 사람들은 진승과 오광 같은 평범한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수백 명의 농민들 앞에서 절박하게 외친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은 영원할 것 같았던 제국을 멸망시킨 역사의 추동력이었습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그들의 꿈은 고려의 노비 만적과 허균의 '홍길동'에게도 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외침은 앞으로도 존재할 지 모를 불평등한 세상에 맞서기 위해 반복적으로 인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보편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마천이 주목한 것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 같은 소수의 지배자들이 만들어가는 역사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 침묵당하고 잊혀진 다수의 백성들이 만들어내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당대의 통치자들이 만들어 놓은 강압적 질서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배자들보다 먼저 지배질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들보다 앞서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앞날을 예지하는 힘을 지니기도 합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동양의 지혜나 '인민의 목소리는 곧 신의 목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서양의 금언은 모두 변화를 이끌어 내는 백성들의 숨은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인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민심을 헤아리고,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해 대비할 수 있는 선견지명을 갖춘 지도자는 성군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폭군이 되어 백성들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멸망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마천(기원전 145년~기원전 86년?)의 초상화


 
사마천은 왜 치욕을 견디며 글을 썼을까

사마천은 '열전'의 처음을 '백이와 숙제'로 시작했습니다.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주왕을 정복하자 멸망한 은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은 사람들로 유교 문화권에서 '의인(義人)'의 대명사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그들의 삶을 유교적 핵심 가치인 '인(仁)'을 실현한 것으로 높이 평가한 공자에게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의 논제를 제시합니다. 하늘의 도리는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가? 공자가 유독 아꼈던 제자 안연은 지개미나 쌀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일찍 죽고 만 반면, 도척이라는 자는 사람의 간을 회로 쳐서 먹는 포악한 짓을 저질렀어도 천수를 누렸는데, 과연 천도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인가?

'사기열전'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하는 '백이 열전'에서 그가 던진 질문은 그의 삶의 경험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한무제가 재위할 당시 국가기록원장에 해당하는 태사령(太史令) 직책을 맡고 있던 사마천은 황제의 역린을 건드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이릉(李陵) 장군이 보병 5,000명으로 그 열 배가 넘는 8만 흉노군과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전멸할 위기에 처하자 부득이 흉노에 투항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소식에 황제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 한무제를 크게 진노했고, 황제의 눈치를 보던 신하들도 하나 같이 이릉을 비난했습니다. 이때 사마천만이 최고 지휘부의 작전실패를 지적하며, 이릉이 항복한 것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변호했습니다. 사마천은 이릉과는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이였고, 단지 국가를 올바르게 통치하기 위해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패전의 책임은 이광리 장군이 져야 했으나 그는 한무제가 아끼던 애첩의 오라비였습니다. 그로 인해 사마천은 황제의 노여움을 샀고 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옥에 갇힌 사마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였습니다. 돈 50만 전을 내고 풀려날 수 있었으나 거부나 권세가가 아니었던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마흔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사형을 받거나,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치욕스런 궁형(宮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자신에게 궁형을 내린 한무제를 환관의 신분으로 평생 모셔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아홉 번씩이나 창자가 뒤틀리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무고한 자신을 불구자로 만든 자들에게 비웃음을 받으며 함께 지내야 한다는 수치심과 분노는 날마다 그의 영혼을 갉아대며 지옥 밑바닥으로 끌어내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영혼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손쉬운 해결책을 선택하는 대신, 낮이면 궁으로 가서 한무제의 시중을 들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사기>를 썼습니다. 백이와 숙제를 통해 제기됐던 저 의문, 즉 과연 천도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지 않고는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수치와 억울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이란 쉽게 하나하나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중략) 사람이란 진정 한 번 죽습니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습니다. 죽음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략) 치욕을 참고 견디며 구차하게 살면서 썩은 흙 속에 잠겼는데도 사양하지 않는 이유는 마음에 품은 것을 모두 드러내지 못해 한스럽고, 헛되이 세상을 떠나 훌륭한 저술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서입니다. (중략) 이들은 모두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는데 배출할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일을 서술해 미래의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임소경에게 보낸 답장', 최경영, 기록자의 윤리, 역사의 마음을 생각하다, 북드라망에서 재인용)

따라서 사마천의 글쓰기는 불의한 세상을 향한 '분노의 글쓰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공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궁형에 처한 한무제에 대해 사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사색적 질문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에게는 "과거의 일을 서술해 미래의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한 백이와 숙제



'빛내주는 친구'와 '빛나는 친구'

친구 사이의 깊은 우정을 나타내는 사자성어로 '지란지교'(芝蘭之交)'가 있습니다. 우정이란 마치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덕이 있는 사람을 친구를 사귀게 되면 서로 동화되어 고매하게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또 우정이란 '문경지교'(刎頸之交)가 뜻한 바처럼 상대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줄 만큼 깊은 신의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와 달리 '관포지교'(管鮑之交)가 전하는 우정은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포숙은 친구 관중의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일찍 알아보았고, 그래서 그가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 언제나 친구를 이해하고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포숙을 두고 관중은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장사를 하는데 친구가 자기 몰래 이익을 더 많이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요? 당장 친구에게 노발대발하며 절교를 선언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송을 걸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숙은 관중이 자신보다 가난해서 그랬을거라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그 후에도 관중은 사업에서 실패해서 파산하기도 했고, 벼슬에서 번번히 쫓겨나기도 했고, 전쟁에서 도망쳐서 비웃음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포숙은 친구가 아직 때를 못 만난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위로하며 기다려주었습니다. 

포숙의 행동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건 그가 자신이 모시던 제나라 환공에게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라고 천거한 것입니다. 관중은 환공의 정적이었던 공자 규 밑에서 일하며 환공을 죽이려 했던 자였습니다. 처음에는 환공도 크게 화를 냈으나 포숙의 집요한 설득에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 부강해진 제나라는 춘추전국 시기 처음으로 천하를 제패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뛰어난 능력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관중보다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본 포숙을 더 칭송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은 친구 관계에서 포숙처럼 친구를 '빛내 주는 이'가 되고 싶은가요, 아니면 관중처럼 '빛나는 이'가 되고 싶은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중처럼 자신이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관중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다려주는 포숙과 같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재주를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을 원망하고 한탄하며 쓸모없는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고 포숙처럼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친구를 보면서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괴로워 하거나, 자신의 재주 없음을 탄식하며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지는 않았을까요? 마차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하며 괴로워 했던 살리에르처럼 말이지요.
 

대장군 한신의 과하지욕(胯下之辱)의 고사를 그린 그림



사마천은 왜 '화식열전'으로 끝맺음했을까

사마천의 '열전'에는 지금 읽어도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고, 밑줄을 긋고 몇 번이고 곱씹어 보게 되는 명문장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시로 출몰합니다.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뒤에서 지혜롭게 통일의 기반을 닦아 나갔던 책사 이사의 공로 덕택이었습니다. 진나라 출신이 아닌 벼슬아치들을 모두 쫓아내자는 '축객령'에 반대하며 이사가 남긴 글은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태산은 한 덩어리의 흙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높을 수 있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깊을 수 있으며, 임금은 한 명의 백성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그 덕을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는데 큰 공을 세운 한신은 또 어떠습니까. 젊은 무명시절 그는 동네 불량배들을 만나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와야 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런 수치도 무릎쓴 까닭은 훗날 큰 일을 도모하겠다는 야심을 이런 사소한 일로 망칠 수 없다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신도 점차 나이가 들어가며 인내심과 대범함을 망각하고 오만함과 자존심으로 혜안을 가렸던 탓이었을까요. 말년의 한신은 눈 앞의 계략을 알아채지 못하고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고 말았습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인내하면서 미래를 기약했던 젊은 날의 마음가짐을 끝까지 지녔더라면 그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한나라의 고조 유방은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서책을 가까이 하라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그는 오히려 자신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사람이라며 자부했습니다. 이때 책사 육가는 한고조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따끔하게 충고했습니다. 자칫 왕의 미움을 사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고조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육가의 고언을 새겨 들었습니다. 덕분에 한나라는 문화의 힘으로 제도를 튼튼히 할 수 있었습니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지혜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마천이 재산을 늘려 부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인 '화식열전'으로 자신의 책을 끝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는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에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바라는 것"이며, "가난을 벗어나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농업은 기술에 미치지 못하고, 기술은 상업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자수를 놓기보다는 시장에 가서 장사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경제 활동의 원천이며,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공공의 이익을 증대시킨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을 그보다 1900여년 앞서 사마천이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당대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물질적 경제력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통찰한 것입니다.

사마천이 경제적 부에 주목한 이유는 "예절도 재물이 있어야 생기고 재물이 없으면 버려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백성들은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차리게 되고,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예의염치를 알게 된다."고 말한 관중의 통찰을 적극 수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즉 사마천과 관중이 모름지기 정치 지도자라면 백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까닭은 물질적인 여건이 갖춰진 후에야 백성들이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열전'은 21세기 현대인들이 읽어도 눈이 번쩍 뜨일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지혜로운 통찰들로 가득합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짧게 간추려진 이 책을 디딤돌 삼아 두터운 원전에 도전해 본다면 그 어디에서도 얻기 힘든 인생살이의 보물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