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지구촌에서 살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2025)가 전세계적으로 큰 화제입니다. 한국의 K-POP 아이돌을 소재로 일본의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작품으로 전세계 넷플릭스 순위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수록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역시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포티파이(Spotify)에서 1,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이미 한국에서 제작된 <오징어 게임>(2021) 같은 드라마가 전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고, BTS나 블랙핑크 같은 인기 아이돌 그룹들이 미국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현해 컴백을 알리는 경우가 자연스러워진 마당에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네플릭스와 같은 전세계적 배급망을 가진 OTT(Over-the-top mdedia service)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제작된 드라마나 음악이 세계적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만약 유튜브나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없었다면 세계인들이 BTS나 블랙핑크의 노래를 듣고 한국어를 배우려는 현상이 가능했을까요? 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문화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2008년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Subprime Mortgage Crisis)는 전세계에 심각한 경제 위기를 가져왔고, 중국의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는 수년 간 전세계를 팬데믹의 공포에 몰아넣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현재 통신과 교통 그리고 자본이 혈관처럼 전지구를 감싸고 있는 세계화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허버트 마샬 매클루언은 교통 수단과 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구 전체가 하나의 마을처럼 축소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며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매클루언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서 오늘날과 같은 변화를 예견한 이가 있습니다. SF소설의 선구자로 알려진 쥘 베른입니다. 1873년에 발표한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 그는 이미 교통 수단의 발전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이 축소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백 년 전에 비하면 열 배는 빠른 시간에 지구를 돌 수 있으니, 결국 지구가 줄어든 셈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쥘 베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아보는 알아보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하지 않는 지리학자
이 소설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매우 수학적이라 할 만큼 체계적이고 규칙적으로 정돈된 일상을 영위합니다. 집에서 개혁클럽에 갈 때도 정해진 보행에 맞추어 걷고, 옷장 속의 옷들조차 번호표를 붙여 체계적으로 관리합니다. 모든 일상 생활이 거의 분 단위로 정밀하게 짜여져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엄격해서 하인이 정해진 면도 온도를 단 1도 낮게 맞췄다고 해고할 정도입니다. 포그는 서양의 합리성과 이성이 체화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계처럼 정확하게 계획된 삶을 살아가던 포그가 개혁클럽 회원들과 세계 일주 내기에 응한 것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최첨단 매체인 신문을 통해 세계에 관한 최신 정보를 끊임없이 흡수했고, 무엇보다 세계 곳곳의 기차와 증기선의 시간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정보를 종합한 뒤 80일 안에 세계 여행을 끝마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기차와 증기선의 출발점과 도착점으로 연결된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내기는 승리가 예정된 게임이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증명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포그는 방문하는 도시를 구경하거나 역사적 장소들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필리어스 포그는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의 둘레를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역학 법칙에 따라 지구 둘레의 궤도를 돌고 있는 무거운 물체와도 같았다." 그에게 여행이란 지구라는 표면 위에 세겨진 데카르트 좌표계 위를 정확한 역학 법칙에 따라 이동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포그가 신문과 책을 통해 세계에 대한 관념적 지도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서재에 틀어박힌 지리학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다와 대양과 사막을 세러 다니는 것은 지리학자가 아니란다. 지리학자는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어서 나돌아 다닐 수가 없어. 지리학자는 자기 서재를 떠나지 않는단다. 그러나 서재에서 탐험가를 맞이하지.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그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거야." 그도 포그처럼 세계에 대한 전체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여행을 해서 국지적이고 개별적인 지식에 갇힐 필요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사실 포그와 생텍쥐페리의 '지리학자' 유형의 선구적 인물은 18세기의 철학자 칸트입니다. 그는 평생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바깥으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었지만, 세계 지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대학에서 지리학 강의까지 개설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이 충분한 경험적 지식을 쌓지 않은 채 사고하는 법만 배우게 된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고 보았고, 그래서 경험적 지식을 대표하는 지리학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그에게 '자연지리학은 세계에 관한 지식'으로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 반드시 습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리적 조건은 역사의 진정한 토대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가와 바다 사이의 자연적 관계와 이것들이 연결되는 이유를 포함하는 이 부분은 모든 역사의 진정한 토대이다."(기사, 인간 역사에 필연적인 ‘지리’… 경험 부족한 철학을 완성하다[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증기기관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나
쥘 베른의 놀라운 통찰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고정불변한 것이라 여겼던 지리적 환경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문지리적 인식 역시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포그의 세계일주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여행을 떠나기 2~3년 전에 일어난 세 가지 획기적 '사건들' 때문입니다.
1869년 이집트에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었습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뱃길이 뚫림에 따라 유럽에서 인도로 가기 위해 아프리카 최남단을 돌아야 했던 북대서양-인도양 항로는 무려 7,000km 이상 줄어들었습니다. 1870년 인도의 뭄바이(서쪽)와 캘커타(동쪽)를 사흘 안에 달리는 2,2127km 길이의 인도반도철도가 완성되었습니다. 1869년 미국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연결하는 장장 6,093km의 제1차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되었습니다. 이로써 태평양 연안에서 대서양을 가기 위해 남미대륙 남단을 돌거나, 파나마 지협을 거치던 최장 6개월의 여정은 단 7일로 단축되었습니다.(기사, 세상은 더 가까워졌고, 위기는 더 빨리 전염됐다) 세계 곳곳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증기기관의 발명이라는 과학기술에 의해 추동된 것입니다.
1705년 영국의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은 대기압식 증기기관을 발명했습니다. 이 장치는 인류 최초로 증기의 압력으로 피스톤을 움직이는데 성공해서 주로 탄광에서 물을 퍼올리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뉴커먼의 기관은 증기를 실린더 안에서 직접 냉각시켰기 때문에 차갑게 식어버린 실린더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석탄이 낭비된다는 결점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인물이 바로 제임스 와트(James Watt)였습니다. 그는 뉴커먼 기관을 효율을 3배 이상 증가시켰고, 피스톤의 상하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바꾸는 장치를 발명해서 증기기관을 펌프뿐만 아니라 모든 기계를 돌릴 수 있는 범용 동력원으로 완성시켰습니다.(참고, 나무위키 '증기기관' 항목)
무생물에서 동력을 만들어 내는 최초의 발명품인 증기기관은 인류에게 에너지의 자유로운 변환과 이용을 가능케 했고, 그로 인해 급진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증기기관의 힘을 이용한 자동방직기의 등장은 값비싼 숙련공들을 몰락시키고 그 자리를 저임금에 손쉽게 부려먹을 수 있는 일용직 미숙련공으로 대체했습니다. 자동화로 인해 생산성은 급격하게 올라갔지만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점점 더 악화되어 불만을 품은 섬유 노동자들이 망치로 기계를 고장내거나 공장을 불태우는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 일어났습니다.
운송수단에 사용된 증기기관은 기차와 증기선을 등장시키며 교통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포그 일행이 세계를 일주하며 요트, 화물선, 썰매, 심지어 코끼리 등 다양한 이동 수단을 이용했지만, 그들의 여행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한 탈 것은 기차와 증기선이었습니다.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하고, 중간계급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여행은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불특정한 다수를 상대로 교통과 숙식 등을 묶은 패키지 관광을 개척해서 세계 최초로 여행사를 세운 인물이 토마스 쿡(Thomas Cook)입니다. 그는 전문 가이드 고용, 호텔 할인권과 객실 예약, 환전, 여행자수표 등을 업계에 도입했고, '토마스 쿡 열차시간표'는 배낭여행자들의 필수품이었습니다.(기사, [유레카] 토머스 쿡과 패키지 관광)
근대 유럽인들이 기차를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게 되면서 기차는 근대를 상징하는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영토를 가로지르는 반도철도를 따라서 인도의 대농장에서 재배된 커피, 육두구, 정황, 적후추와 영국에서 생산된 면제품은 재빨리 운송되어 인도의 부가 최대한 효과적으로 영국으로 유출되도록 했고, 영국의 통치에 저항하는 반란이 발생할 경우 군대를 적제적소에 파견해 효율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기차는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라 식민지 전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착취하는 지배 시스템 그 자체였습니다.
기차를 통해 이동한 것은 상품과 군대만이 아니었습니다. 기차는 보편성과 인권이란 이름으로 서양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식민지에 유포하는 전파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포그와 파스파루트는 아내가 남편의 시신과 함께 화장되는 힌두교의 옛 풍습인 사티 때문에 죽을 운명에 처한 아우다 부인을 구한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인도에 아직 그런 야만적인 풍습이 남아 있습니까? 영국 정부가 그런 걸 금지시키지 않았나요?" 영국은 여성의 인권을 존종하는 문명국가인 반면, 인도는 아직 미개한 야만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편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구출 에피소드는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 상태에 놓인 식민지 백성들을 계몽시키고 구출하는 일을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의 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포그 일행이 지구의 동쪽 방향으로 출발해서 거쳐간 이집트, 인도, 홍콩 등에 이르는 경로는 곧 서구의 식민지 지배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의 시공간이 압축되었다는 것은 곧 서구의 세력이 전지구적으로 흩어져 있는 식민지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현실을 만들게 될까
천신만고 끝에 런던에 도착한 포크는 당초 예정한 '80일 이내' 세계 일주 도전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파스파르투의 도움으로 자신이 하루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구 경도를 1˚씩 넘을 때마다 4분씩 현지 시간이 단축되므로, 지구를 한 바퀴 돈 뒤(4분 X 360)에는 해당 지역 표준시 기준으로 하루(1,440분=24시간)의 시간이 절약된다는 사실을 그는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 구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1884년 본초 자오선을 정하기 위해 세계 25개국 41명의 대표단이 미국의 워싱턴 D.C에 모였습니다. 철도와 전신의 발달로 국제적인 시간의 표준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표준시가 정해지기 전 기차의 운행시각은 각 철도회사가 임의로 정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은 오롯이 승객들의 몫이었습니다. 1883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철도연합시간총회에서 철도 경영자들이 표준시간을 4개로 줄이는데 합의할 때까지 북미 지역에서는 무려 50개가 넘는 철도시간표가 쓰였습니다. 각국은 지구 시간의 기준점인 경도 0도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지만 결국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관통하는 선을 기준으로 전세계의 표준 시간이 정해졌습니다. 뚜렷한 과학적 근거도 없이 서구 강대국들의 정치적 논리에 의해 결정된 표준 시간은 이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보편적 원칙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운송수단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손쉽게 해외 여행을 할 수 있고, 또 인터넷을 통해 지구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러한 현실이 이제 막 형성되던 시기에 쓰여진 작품입니다. 이 책의 독서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당연시 해온 현실이 사실은 다양한 조건과 힘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추상적인 공간과 시간 개념조차 역사적 그물망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되어 온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앞으로 어떤 현실을 만들어가게 될까요? 우리가 쥘 베른에게 배울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미래의 세계를 상상하는 법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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