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소와 늑대는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현실에서 육식동물인 늑대와 초식동물인 염소가 우정을 쌓고 친구로 지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늑대는 염소를 잡아먹어야 살 수 있고, 염소는 그런 늑대로부터 도망쳐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게 타고난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위대한 점은 이런 불가피한 삶의 조건을 역전시켜 상상하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는 것입니다. 1994년 처음으로 출간된 이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나 뮤지컬로 제작되어 지금껏 꾸준히 사랑받아온 키무라 유이치의 동화 <폭풍우 치는 밤에> 역시 그렇습니다.
염소 메이와 늑대 가부는 물을 퍼붓는 것처럼 세찬 폭우가 내리던 한밤중에 작은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화창한 한낮에 만났다면 필사적으로 쫓고 쫓기는 상황이 발생했겠지만, 한밤중 매섭게 내리는 폭풍우에 오갈 데 없이 고립된 낯선 존재들은 오히려 서로를 의지하며 불안과 고독을 이겨냈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은 그들의 눈을 가렸고, 거센 빗줄기와 천둥 소리는 그들의 귀를 막았고, 지독한 코감기는 그들의 체취를 지웠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오직 목소리로만 서로의 존재를 더듬으며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감각 기관에 의존해서 바깥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할 수밖에 없지만, 그 감각 기관들은 수시로 오류와 착각을 유발시킨다는 점에서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되지는 못합니다. 염소 메이가 늑대 가부가 짚고 온 작대기 소리를 발굽 소리로 착각한 것이나, 자신의 허리에 부딪힌 늑대의 발을 무릎으로 오인한 것도 그러한 예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감각은 선입견과 편견에 곧잘 휘둘리기도 해서 우리가 그릇된 판단을 내리도록 인도하기도 합니다. 상대를 판단할 수 있는 대부분의 감각이 차단된 상태가 되어서야 염소와 늑대 사이에 우정이 싹 트게 된 것은 우리가 감각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우리 곁에 있는 상대의 진면목을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위태로운 그들의 우정
김유정의 <동백꽃>에서 주인공 '나'는 점순이가 집에서 몰래 빼내온 감자를 건내며 무심코 건낸 "느 집엔 이거 없지?"란 말 한 마디에 기분을 상하게 됩니다. '이거 귀한 거니까 어서 먹어.'란 의도로 말한 점순의 말을 '나'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무시한 말로 곡해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뒤부터 주인공를 향한 점순의 모든 애정 표현은 그에게 경멸과 무시의 뜻으로 해석되어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와 달리 <폭풍우 치는 밤에>에서 오해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배고픔을 느꼈던 염소와 늑대는 말랑말랑 골짜기 근처에서 구했던 맛있는 먹이를 떠올리며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의도한 '맛있는 음식'은 각각 '풀'과 '고기'로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염소와 늑대는 그 의도는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기표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그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빨리 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단다."라는 말을 똑같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닮은 데가 많다며 감격해 했습니다. 염소와 늑대의 부모가 동일한 의미로 저렇게 말했을 리가 없음에도 그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주고 받는 모든 대화들은 공허한 동문서답에 불과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의 독자들은 염소와 늑대의 대화를 읽으며 웃음을 머금게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우정을 위태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를 같은 종족이라 오해하고 있지만, 독자는 그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독자는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과연 그들은 서로의 종족을 확인한 뒤에도 세상에서 마음이 가장 잘 맞는 친구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웃음 가득한 연극적 동화
이 동화는 작은 오두막이란 협소한 무대 위에서 염소와 늑대라는 천적 관계의 두 배우가 등장해서 펼치는 연극처럼 보입니다. 작가는 적대적 두 동물이 친구가 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해 과연 우정의 조건이 무엇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겉모습이나 외적 조건보다는 마음이 잘 맞아야 한다는 상투적 교훈을 선택하는 대신 아이러니한 대사와 열린 결말을 통해 우정의 (불)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뚝심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므로 간결하면서도 재치 있는 대사로 쓰여진 이 작품을 읽을 때는 연극적 상황과 아이러니한 언어 사용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이들 두 명이 각각 메이와 가부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하며 읽는다면 이 동화의 매력을 한껏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빨리 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단다."와 같은 문장을 염소와 늑대는 각각 어떻게 다르게 이해했는지 질문하면서 읽게 한다면 말이 발화자의 의도나 문맥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 되는 한편, 이 작품이 지닌 독특한 언어 사용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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