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시 수업

시는 사물을 재탄생시키는 창조의 작업이다

ddolappa72 2024. 11. 10. 11:59

시는 왜 어려운가

많은 사람들이 시를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익숙한 사물을 다루더라도 낯설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 낯섦을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그 낯섦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시인은 이미 알려진 사물들을 새로운 시점에서 관찰하고, 일상의 언어와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를 통해 사물들은 새로운 의미로 충전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익숙한 사물들이 낯설어지고, 그것에 대해 새롭게 생각을 해야 한다는 필요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문학이란 원래가 자동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중단시키고 낯설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동화된 사고는 실은 생각이 멈춘 상태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가 낯설고 어려운 것은 그런 자동화된 생각에 충격을 가해 스스로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가) 종이

종이 속에는
뭐든지 다 들어 있다.
볼 때는 하얀색이지만
자세히 보면
뭐든게 다 있다.

종이 속에는 
원하는 것이
모두 있다.
장난감도
꽃들도
모두 있어
연필과 색연필만 있으면
부러울 것 없다.

동생의 어린이집도
모두 그리고 색칠하고
상자에 넣으면
난 세상에서 가장 멋진 부자

(2학년 학생의 시 '종이' 전문)

이 학생은 왜 흰 종이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했을까요? 그냥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하얀색 종이 안에 왜 금과 은, 보석은 물론 장난감이나 꽃들도 모두 들어 있다고 했을까요? 그 단서는 "연필과 색연필만 있으면/부러울 것 없다"는 구절에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흰 종이 위에 연필과 색연필로 자신이 그려 넣기만 하면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꼬마 시인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부자"라고 노래합니다. 

이 학생은 우리에게 익숙한 종이를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으로 새롭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그 종이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행위는 흰 종이 속에 숨어 있는 사물들을 발굴해내는 행위이자 원하는 것을 생산해내는 활동이 됩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자 자신의 행동이 지닌 의미 역시 달라졌습니다. 시 쓰기는 이처럼 세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나) 의자

의자 위에 앉으면
의자는 "무거워!" 하며
버텨보려고 하지만
그만 힘이 빠져
철푸덕
더욱 무거운 사람이 오면
의자들은 "덜덜덜"
그 사람이 앉은 의자는
버티려고 하다가
꽈지직
다른 의자들은
무서움에 떨다가 다같이
꽤꼬닥

(2학년 학생의 시 '의자' 전문)

이 학생은 의자의 시점에서 생각해본 시를 썼습니다. 우리는 평소 의자에 앉으면서 우리 몸무게 때문에 의자가 힘들어 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자는 원래부터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고안된 사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 옵니다. 의자는 매순간 힘겹게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며 버텨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의자에게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철푸덕' 주저앉는 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 비극적 광경을 함께 목도한 동료 의자들은 더 무거운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떨게 됩니다. 러시안 룰렛 게임처럼 또 누군가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연속적으로 동료들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다른 의자들이 누가 앉은 것도 아닌데 다같이 쓰려진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삶의 의지를 무너뜨린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참혹하게 홀로 죽느니 차라리 다같이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일까요? 

의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은 공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려 압사를 당해야 하고, 동료의 비극을 지켜보며 공포에 떨다가 자신도 언젠가는 같은 운명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는 의자들의 점증하는 공포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철푸덕, 꽈지직, 꽤꼬닥' 같은 단어들은 시의 장난스러움을 배가시켜 줍니다. 이 학생은 처음부터 의자들이 부서지는 광경을 술래잡기 같은 일종의 게임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술래에게 잡히면 게임에서 아웃되듯 무거운 사람에게 당첨된 의자는 삶에서 아웃됩니다. 이런 장난스러운 상상력이 이 시의 매력입니다.


시는 사물을 재탄생시키는 창조의 작업이다

(다) 지우개

반듯한 조약돌 같기도 하고
멀리서 보면 상자 같기도 한

반듯한 자신의 몸이 타 들어가는 줄도,
자신이 작아지는지도 모르고

하얀 몸이 어떻게 되든
빽빽한 종이를 성실하게 지워주는
지우개
(4학년 학생의 시 '지우개' 전문)


(라) 지우개

종이에 있는 연필 가루를
지워내고 똥을 싸는 지우개
많이 쓸수록 더 작아진다.

지우개가 
내 걱정도
지울 수 있다면
내 마음의 고통도 
지울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4학년 학생의 시 '지우개' 전문)


(다)의 시를 쓴 학생은 지우개가 줄어드는 모습을 '몸이 타들어 간'다고 상상합니다. 왜 이 학생은 지우개와 불을 연결해서 생각한 것일까요? 그리곤 지우개의 '성실'을 강조합니다. 이 두 개의 시어로 유추해 보면, 이 학생은 지우개를 보며 불에 맞서 싸우며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용감한 소방관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지우개도 소방관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제 할 일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시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지우개는 소방관이다'라는 은유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라)의 시도 (다)의 시처럼 '지우개'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이 시를 쓴 학생도 지우개가 줄어드는 모습에서 출발하지만, 지우개의 그 역할을 자신의 내면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지우개가 지워내는 '연필 가루'는 어느새 마음 속 '걱정과 고통'으로 치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지우개라는 사물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마음 속 상처와 걱정이 사라지기를 염원하는 시입니다.

이처럼 같은 사물을 놓고 시로 쓰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두 시들에서 포착되는 지우개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일상에서 지우개는 종이에 연필로 쓴 얼룩을 지우는 역할을 하는 사물로 인식된다면, 아이들이 쓴 시 속에서 지우개는 '자신을 희생하는 용감한 소방관'이자 '걱정과 고통을 치유해주는 치료제'로 변신합니다. 시 쓰기를 통해 지우개는 고정된 기능과 의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지닌 사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는 사물들을 자동화되고 관습화된 의미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창조의 작업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