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교육

(융합수업)거울아, 거울아

ddolappa72 2024. 10. 12. 18:23

수학을 잘 하면 이과이고, 국어를 잘 하면 문과인가?

한국 교육의 특징 중 하나는 이과와 문과를 구분하고, 각 분야에 재능있는 학생을 길러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1959년 영국의 과학자이자 소설가였던 찰스 P. 스노우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리드 강연에서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이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인 문화 간의 단절은 문화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 발전에도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고 강조했습니다.(C.P.스노우/오영환 번역, 두 문화, 사이언스북스) 이후 이 두 분야를 연결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했고, 한때 융합이나 통섭과 같은 단어들이 우리 사회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수학과 문학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 사회를 전망하는 다양한 글들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 방식이 미래에 필요한 인력을 제대로 길러내고 있다는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대부분의 미래학자들은 과거에는 한 분야에 특화된 지식을 습득한 전문가를 필요로 했다면 미래에는 전문성과 함께 전체를 조망할 능력을 갖춘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인재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해왔던 교육 방식을 반성해 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새로운 유형의 교육 모델을 함께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융합 수업'이라는 모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융합'이란 단어는 단순히 전문적인 지식들을 섞거나 혼합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럴 만한 역량도 없고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학생들이 하나의 대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사물을 보고 신학적 관점에서 '아담의 사과'를 떠올릴 수 있고, 과학의 관점에서 뉴턴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고, 미학의 관점에서 세잔의 사과 정물을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그러한 과정을 통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 그것들을 종합해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융합 수업의 주제로 선택한 것이 '거울'입니다. 거울은 오래 전부터 인류를 매혹시킨 사물 중 하나였습니다. 플라톤은 시가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을 2차적으로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독특한 모방 이론(mimesis)도 따지고 보면 원본과 거울에 비친 복제본 사이에 위계를 설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중 자아를 가리키는 '도플갱어'도 거울에 기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수많은 화가들의 자화상 역시 거울이 없었다면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이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같은 회화들에서는 거울이 독창적인 미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중심 매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라바지오, <나르키소스>, 1597-1599



왕비는 왜 거울에게 물어 보았을까

우선 학생들에게 동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왕비는 왜 매일 거울한테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물어보았을지 질문해 봅니다. 중학교 3학년만 되어도 제법 쓸 만한 대답들을 내놓습니다. 학생들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인데 굳이 거울에게 묻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자기 확신과 주체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녀에게 거울이란 그녀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변형된 사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나르시소스가 왜 수면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흔히 나르시소스를 '자기애'를 뜻하는 나르시시즘의 주인공으로 알고 있어서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보면 그는 수면에 비친 허상을 자신의 모습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카라바지오가 그린 '나르키소스'를 보면 주변을 온통 까맣게 해놓았는데, 이것은 그가 타인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온통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데 바로 그러한 과정이 그에게는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수면에 비친 모습을 자신이 아니라 타인으로 오인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게 된 것입니다. 즉 그에게 거울은 자신을 오해하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거울은 어떻게 대상을 비추는가

이번에는 실제로 거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봅니다. 우선 물체에서 출발한 빛이 거울에 반사됩니다. 반사된 빛은 다시 거울 뒤에 물체의 형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빛이 직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빛이 반사되었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거울 뒤편에 물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울을 마주고 서 있으면 거울 속의 내 모습과 실제의 나는 좌우가 바뀐 것처럼 느껴집니다. 현실의 내가 오른손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왼손을 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울 경계면을 기준으로 실제의 나와 거울에 비친 내가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입니다. 거울에 생긴 상은 좌우 대칭이라기보다 거울 경계면을 기준으로 앞뒤가 대칭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거울에 비친 형상은 실제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거울 속 이미지는 빛의 반사와 우리 뇌의 착시가 합작해서 만들어낸 착각이라는 점에서 실제와 많이 닮았지만 허상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허상이라 할 지라도 거울은 인간이 자아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된 아기는 처음에는 자신의 몸을 조각난 것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몸을 총체적이고 완전하게 인식하게 되면서 통일된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이것을 '거울 단계'(Mirror Stage)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자아상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거울에 비친 상상하는 '나'와 현재하는 '나'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거울 단계에 형성된 '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라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보이는 '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늘 '상상하는 나'와 '현재하는 나'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상의 이상한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 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의 시 '거울' 전문)

이상의 시 '거울'을 읽고 시의 화자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보도록 합니다. 먼저 이 시는 거울이 거울 밖 세상을 거꾸로 비춘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씌어 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란 구절은 '거울 밖 세상은 시끄럽다'로 유추해서 읽게 됩니다. 거울 속 '나'가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를 가지고 있다는 구절은 시적 화자의 답답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시에서 거울은 현실의 자아를 성찰할 수 있게 하는 반성의 매개체이지만 동시에 자아를 분열시키는 파괴적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윤동주도 시 '자화상'에서 '우물 속의 자아'와 '우물 밖의 자아'로 분열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자아 분열은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합니다. 일본어가 '국어'가 된 세상에서 사라진 나라의 언어로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작가들로서는 분열된 내면의 모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시의 말미에서 화자는 거울 속의 자신이 현실의 자신과 반대지만 또 꽤 닮았다고 진술한 뒤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어서 섭섭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현실의 자아도 병 들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외로된사업', 즉 문학에 골몰하는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신산스런 마음 풍경이 시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추가로 학생들에게 왜 이상은 띄어쓰지 않고 시를 썼을 지 질문해 봅니다. 띄어쓰기가 없으니 시를 읽기가 무척이나 답답했다고 하면서 시인도 그런 마음을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자아를 분열시키는 외부의 강한 충격에 맞서서 자신의 통일된 의식을 지켜내기 위해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기술하는 문학 기법을 창안해 냈습니다. 이상의 시를 일종의 초현실주의 기법이 적용된 작품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상은 자아를 분열시키는 식민지 현실에 맞서 통일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썼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거울이 그의 분열된 내면을 노출시키는 수단이었다면, 글쓰기는 분열된 마음을 다시 통합하는 치유의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벨라스케스, &amp;lt;시녀들&amp;gt;, 1656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1656)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뛰어난 작품입니다. 원래 화가 자신은 이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지만, 1834년 프라도 미술관에 보관되면서 처음으로 '시녀들'(Las Meninas)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제목 자체가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공주를 그렸지만 공주의 초상화도 아니고, 화가 자신을 그렸으나 자화상도 아니며, 왕가의 가족들이 등장하나 왕가의 초상화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상황을 공들여 구성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호함 때문에 이 작품은 미셸 푸코나 자크 라캉과 같은 철학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학생들이 이 그림을 해석하기 전에 우선 그림 속 인물들을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림의 정중앙에는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가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 옆에는 검은 눈과 검은 머릿결을 가진 카스티야 지방의 귀족 딸들이 시녀로서 서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에는 왜소증 시녀 마리아-바르볼라가 서 있습니다. 또다른 왜소증 시종 니콜라시토 페르투사토가 졸고 있는 개 위로 발을 올리고 있습니다. 공주 뒤편의 어둠 속에서 수녀 복장의 시종장 도냐 우요아와 궁중 경호원 돈 디에고 루이제가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림 왼쪽에는 화가 벨라스케스가 캔버스에서 조금 물러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뒤편 거울에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부모인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4세 부부가 흐릿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벽면에 상단의 대형 액자들 아래로 문이 열려 있고 문 뒤에는 왕비의 시종 호세 니에토가 서 있습니다.(기사, '시녀들'의 뫼비우스 띠 같은 시선, 문득 그림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다)

자, 화가가 어떤 상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인지 묻습니다. 우선 이 그림은 공주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실에 국왕 부부가 방문한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국왕 부부가 공주를 데리고 화가의 작업실에 방문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화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화실을 모습 자체를 그림으로 남기려 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그림을 해석하고 여러 가지 가설을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마르가리타 공주, 도냐 이사벨, 왜소증 시녀 마리아-바르볼라, 그리고 화가 벨라스케스의 관점에서 그림을 해석해 보도록 합니다. 그런 다음 화가는 왜 방 뒤편 거울에 유령처럼 희미하게 비친 국왕 부부의 모습을 그려 넣었을지 추측해 보도록 합니다. 세상의 중심에는 왕이 있고, 왕은 그림 속 세상을 지탱하는 핵심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국왕 부부의 시선이 관람객의 시선에 맞춰져 그려졌다는 사실은 화가가 관람색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림 속 세계는 왕에 의해 유지되고 있지만, 화가의 예술 세계는 관객이 바라볼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해석이 있습니다. 한 학생이 이 그림의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관객의 위치에 거대한 거울을 배치했을 것이고, 그 거울은 국왕 부부를 비춘 거울과 마주보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마치 그림은 평면 거울을 마주 세워 놓은 것처럼 그림 속 공간을 무한하게 되비추고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 속 세계는 사방이 거울로 되어 있는 거울방에 들어선 것처럼 실제와 허상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뒤섞여 있는 세상이 됩니다. 화가는 대체 무엇을 그리려 했던 것일까요?

이런 방식으로 동화와 신화, 과학, 철학, 시, 회화 등 다양한 관점에서 거울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런 방식의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되고, 다양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