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2

N.K. 샌다즈/이현주 번역, 길가메시 서사시, 범우사

ddolappa72 2026. 2. 8. 23:17

 
과학은 신화를 꿈꾸는가

구글 자회사인 바이오기업 칼리코(Calico)는 노화를 극복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연구 기획을 추진하며 '길가메시 프로젝트'라 명명했습니다. 약 4,500년 전 불사와 영생을 꿈꿨던 고대 수메르의 전설적인 왕이 현대로 소환된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던 길가메시의 무모한 도전이 인간의 필멸성을 재확인하는 데서 씁쓸하게 끝났다면, 인간의 유전자 정보를 완벽하게 분석해 게놈 지도를 완성한 현대 과학은 미래의 인류를 신과 대등한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지위에 올려놓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길가메시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있다."는 유발 하라리의 경고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현대의 최첨단 과학은 길가메시와 진시황의 꿈을 성취할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해낸 끔찍한 괴물을 마주해야 하는 악몽을 선사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는 의학 기술의 발달, 영양 공급의 개선 등으로 인해 과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평균 수명이 크게 연장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는 젊음을 유지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욕망에 더욱 더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랫 동안 신에 의해 금지된 영역에 인간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 때 인류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잃어버린 실낙원의 재탄생일까요, 아니면 끔찍한 형벌이 영원히 계속되는 무간지옥의 재림일까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망설이는 현재의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는 다시 길가메시의 시대로 돌아가 처음부터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고, 고대인들의 지혜를 경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신화는 인간이 현실에서 직면하는 딜레마들에 대한 상징적 해결책을 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여전히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가메시(오른쪽)와 엔키두(왼쪽)의 싸움



신들은 왜 '폭군' 길가메시에게 '친구' 엔키두를 보냈을까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으로 창조된 길가메시는 젊고 용감한 우륵의 왕으로 그의 힘을 당해 낼 상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이 "길가메시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종을 울린다."고 말할 만큼 폭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슬기롭고 관대한 목자여야 했건만 실상은 끝없는 노동력 착취로 아들들은 아버지 곁에 남아 있질 못하고, 딸들에게는 초야권(初夜權)을 함부로 휘둘렀습니다. 백성들의 자자한 원성은 하늘에 있는 신들의 귀에까지 닿았고, 신들은 길가메시에 맞서기 위해 엔키두를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엔키두는 영양떼와 같이 언덕에서 풀을 뜯어먹고 짐승들과 물 웅덩이 속에 숨어 지냈을 만큼 문명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인간이었습니다. 엔키두의 야생성은 신성한 창녀를 만나 함께 지내며 순치되었습니다. 그와 어울리던 동물들은 모두 도망가고, 그의 머릿속에 지혜가, 가슴속엔 인간의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권하는 '빵과 술'을 먹고 마시며 엔키두는 점차 문명인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마침내 우륵에 도착한 엔키두는 초야권을 행사하기 위해 새 신부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길가메시를 만나 성난 황소들처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힘을 겨룬 그들은 도전히 승패를 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서로의 힘에 감탄하며 친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 순간 길가메시의 난폭한 성질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길가메시는 왜 엔키두를 만난 후에 그 흉폭한 성정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이야기가 길가메시라는 영웅의 성장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즉 '폭군' 길가메시는 긴 여행을 끝에 지혜로운 군주로서 칭송받는 노년의 길가메시의 유년 시절의 모습일 뿐입니다. 세상에 자신이 전부라고 믿었던 미성숙하고 어린 왕은 넘치는 힘과 에너지를 오로지 자신의 육체적 쾌락을 충족시키는데만 골몰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세상 전부라고 착각하는 편협한 인식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자아'인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에 가까웠던 길가메시와 동물에 가까웠던 엔키두는 서로 상극의 존재들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서로를 없애기 위한 적으로서 만났습니다. 하지만 싸움을 통해 이들은 서로를 대등한 힘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서로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친구란 '편협한 나'를 뒤돌아 보게 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엔키두가 길가메시와의 첫 만남에서 "나는 옛 질서를 바꾸러 왔노라!"라고 외친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진정한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자아는 '옛 질서'를 떠나 '새 질서'에 맞춰 살게 됩니다.
 

죽은 엔키두를 안고 슬퍼하는 길가메시



훔바바를 찾아서

친구가 된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훔바바가 산지기로 지키고 있는 향나무 숲을 향해 모험을 떠났습니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도시 우륵을 유지하고 보수하기 위해 다량의 향나무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길가메시의 야심은 그 숲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어 명성을 떨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칭송과 인정만이 자신의 삶을 영원히 빛내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만의 대가로 길가메시의 제2의 자아인 엔키두는 신들로부터 벌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로잡힌 훔바바가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그를 측은하게 여긴 길가메시가 그를 풀어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엔키두는 단호한 태도로 그의 연약한 마음을 지적하며 훔바바와 그의 부하들을 죽여야 후환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몇 번이나 망설이고 주저한 끝에 길가메시는 친구의 말에 따라 숲의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길가메시는 적이었던 엔키두를 친구로 만들었듯이 적대자로 만난 훔바바와도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만약 길가메시가 엔키두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엔키두는 신들의 저주를 받지 않았을까요? 엔키두의 죽음을 통해 알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시 수메르인들은 자신의 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반대편이라 하더라도 언제든 여건만 맞으면 자신의 찬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세상 사람들을 친구와 적 두 가지로 나누고,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악으로 몰아 제거하려는 경향이 강해진 오늘날의 세대가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엔키두는 죽기 직전 죽음의 환영을 친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곳은 지하 세계의 여왕 이르칼라가 통치하는 곳으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거슬러 올라올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인 채 먼지와 진흙을 음식과 살코기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군주들과 왕자들도 왕관이 벗겨진 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들은 길가메시는 왕으로서 자신이 누리고 있던 지위와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었던 명성이 얼마나 헛되고 부질 없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거울에 비춰보았을 때 이승의 모든 가치있는 것들 중에서 허무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을 만한 것은 과연 몇 가지나 될까요? 

친구의 죽음을 통해 길가메시는 "삶의 최후는 슬픈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애도 과정을 거친 뒤 엔키두의 죽음을 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서 평범한 왕으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길가메시는 지금까지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친구의 죽음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숨결을 느낀 길가메시는 죽음을 극복하여 영원히 살고 있다는 우투나피시팀을 만나러 머나먼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집요하고 진지하게 탐구하는 열정이야말로 길가메시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었던 가장 중요한 동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경에 제작된 '사자를 압도하는 영웅' 조각상. 주인공은 길가메시, 황소는 여신 이시타르가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가메시는 무엇을 깨닫고 귀향했을까 

길가메시는 왕으로서 누리던 부와 권력을 모두 버리고 우트나피시팀을 찾아 광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홍수에서 살아 남은 유일한 생존자로서 신들이 그에게만 영원한 생명을 주어 태양의 정원인 딜문 땅에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덧없는 허명을 추구하던 혈기왕성하던 젊은이였던 길가메시는 이제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아는 중년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가 영원한 생명을 찾아 방황하던 장소는 인간이 거주하는 곳도 아니고 신들이 머무는 곳도 아닌 '중간 지대'로서 일종의 신화적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반은 인간 반은 용의 형상을 한 스코르피온을 만나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포도로 술을 빚는 시두리 여인과 대화도 나누고, 뱃사공 우르샤나비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우트나피시팀이 있다는 딜문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들은 후 길가메시가 보인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습니다. "지금 당신 모습을 보니 저와 다를 게 없습니다. 색다른 것이라곤 없군요." 그 이유는 우트나피시팀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영구 불변하는 것은 없다. 영원히 남아 있을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약속을 언제까지고 영원히 지킬 수 있을까? (....) 잠든 자와 죽은 자, 그것은 얼마나 비슷한가! 그것들은 색칠한 죽음과 같다. 주인과 종이 운명을 다했을 때 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길가메시가 목숨을 바쳐 심연으로 여행을 감행해서 겨우 만나게 된 사람으로부터 듣게 된 이야기가 고작 이것뿐이라니!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존재라는 사실은 이미 길가메시도 알고 있던 것이 아닌가. 영원히 사는 법을 알려고 왔는데 그런 비법은 전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니 허탈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 뒤에도 길가메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번번히 어이없게 놓쳐 버리고 맙니다. 우트나피시팀이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7일 내내 혼곤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또 바다 밑에서 다시 젊음을 회복시켜 준다는 불로초를 겨우 구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목욕을 하는 사이 뱀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던 길가메시의 계획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길가메시는 실패한 여행을 통해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에서 '길가'는 '늙은이', '메시'는 '젊은이'를 뜻하며, 그래서 그의 이름은 '늙은이가 다시 젊어진다.'를 의미합니다. 그가 뱀에게 빼앗겼던 그 불로초의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늙은 사람이 다시 젊어지는 일은 없다는 반어적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인 늙음과 죽음을 회피하는 일은 곧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로 인해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노년의 길가메시는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평범한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는 여행을 통해 길가메시는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롭고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의 깨달음은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는 시두리 여인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