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6학년

손연자, 마사코의 질문, 푸른책들

ddolappa72 2026. 3. 2. 00:07

 

역사를 동화로 읽는다는 것

역사를 처음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에 객관적 사실이 나열된 역사책은 아무리 쉽게 씌어져 있어도 읽어내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시대에 사용된 낯선 개념들이나 단어들도 많은데다 딱딱한 서술 방식이 익숙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지를 탐사하는 현장 체험이나 역사를 다룬 영화를 관람한 후 토론을 하는 등 다양하고 입체적인 수업 방법을 채택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역사와 친숙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아마도 역사동화를 함께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업 교재로 삼기 위해 수많은 역사동화를 검토해 보면 막상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책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역사동화들이 역사적 사실 전달에 급급하거나 작가의 역사관을 노골적으로 노출하는 경우가 많아 '동화'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갖추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고대사를 다룬 역사동화의 경우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부족하다 보니 실제의 역사와 상관없는 환타지물이어서 '역사동화'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조차 민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원인은 아마도 역사에 관한 동화를 쓰는 대다수의 작가들이 아이들에게 역사적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 정도로 자신의 글쓰기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역사를 동화로 옮겨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활동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역사를 문학화하는 작업은 추상적으로 일반화된 역사적 사실로 축소된 과거의 삶에 개성을 지닌 개별적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책에서 다루는 역사는 마치 차가운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기계장치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기술된다면, 문학화된 역사는 그러한 역사적 흐름을 만들었던 개별적 개인들의 욕망과 심성, 그들이 놓인 정치경제적이고 사회문화적 조건을 입체적으로 다룸으로써 세상을 종합적으로 성찰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합니다. 역사동화를 통해 길러진 역사적 상상력은 독자를 누스바움의 표현대로 "분별 있는 관찰자"로 성장시켜 '감정적 합리성'을 갖춘 윤리적 인간으로 재탄생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마사 C. 누스바움/박용준 번역, 궁리)

 



아이의 눈으로 역사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의 지나간 사실을 동화라는 장르의 관점에서 재서술한다는 것은 우선 아이의 눈으로 작가가 다루고자 하는 시대와 사건을 보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쓴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시대의 생활 풍속과 사회적 환경이 생생하게 그려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무엇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이의 생활 감정이 섬세하게 포착되어야 합니다. 또 그것이 현재 책을 읽는 어린이의 지적 수준이나 감수성에 부합하게 글로 전달되어야 비로소 읽을 만한 역사동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동화 작가는 처음부터 이런 이중의 과제를 떠맡아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 손연자는 일제 강점기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해야했던 다양한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재현합니다. 칠판 위에 걸려 있는 일장기를 똑바로 바라보고 큰 목소리로 황국 신민의 맹세를 외워야 했고,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한 친구의 이름을 불러야 했으며, 조금이라도 교칙을 어기면 무서운 일본인 선생한테 따귀를 맞고, 걸상을 들고 벌을 서거나 냄새 지독한 변소 청소를 해야만 했던 당시 아이들을 보면서 현재의 아이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역사책이 일제는 조선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해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고 가르친다면, 동화는 위반 막대기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그런 정책의 의도와 목적을 몸 전체로 깨우치도록 합니다. 일본인 선생은 '재미있는 놀이'라며 일본말로 '위반'이라고 쓰인 나무패를 아이들한테 전달합니다. 그리고 노는 시간에 조선말을 쓰는 자가 있으면 그걸 전해주고, 종례 시간에 맨 마지막으로 나무패를 가지고 있는 학생을 처벌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위반'의 나무패는 교실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고 돌았꼬, 그 때마다 동무를 원망하는 마음들을 어린 가슴에다 죽죽 긋고 떠났습니다. 그걸 넘겨받은 아이는 유리창을 스치는 바람결에도 고개를 홱홱 돌렸습니다." 결국 위반 나무패는 단순히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조선인 학생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증오하게 만들어 그들을 분열시키게 만드는 일제의 악날한 통치 방식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꽃잎으로 쓴 글자')

이처럼 아이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되면 미시적인 일상 생활의 수준에서 일제의 식민 정책이 어떻게 침투해서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어린이의 시선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눈으로 어른들이 맹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거짓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것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사코는 할머니와 함께 히로시마에 있는 평화 기념 공원을 방문하게 됩니다. 가는 내내 할머니는 마사코에게 일본이 부당하게 원자폭탄을 맞은 피해자임을 강조하며 다시는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마사코는 일본이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왜 미국이 원자 폭탄을 투하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일본도 가만히 있었으면 꼬마 같은 건 안 떨어뜨렸을 거야. 그렇지 할머니? 그치, 응?"
"마사짱, 하여튼 우린 당했단다. 우린 피해자란 말이야."
"글쎄 뭘 잘못해서 그랬냐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렇게 무서운 꼬마를 떨어뜨리지는 않았을 거 아냐,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는 마사코의 질문에 변변한 대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세대를 전쟁의 희생자라고만 생각했지, 끔찍한 전쟁의 가해자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마사코의 순수한 질문은 바로 어른들이 굳게 믿고 있는 위선과 아집과 거짓를 산산조각내고 있습니다. 일본의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도록 한 설정은 작가의 탁월한 역사적 재치가 빛난 부분입니다.('마사코의 질문') 


증오와 부끄러움을 넘어서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과 민족의 수난으로 점철된 우리의 근대사는 어떤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감추어야 될 치부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며, 그것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자존심도 회복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예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 미래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모든 과거의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있어요. 그러므로 젊은 당신들은 우리의 과거를 알아야 해요. 그게 자존심이에요. 자존심이 있어야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아니, 자존심이 있으면 벌써 벗어난 거예요."('작가의 말' 중에서)

일제 강점기를 다룬 역사동화가 종종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가해자인 일본을 증오의 대상으로 보고, 피해자인 우리가 입은 끔찍한 고통과 수난을 부각시켜 소위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전략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외부에 적을 상정해서 내부를 단속하고 결속시키는 파시즘식 정치전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런 역사 서술은 국제적 교류와 연대가 활발한 지금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손연자 작가의 말처럼 역경을 딛고 일어나 자존감을 회복하는 자기 극복의 서사가 '성장'을 지향하는 역사동화에 더 적합한 서사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경험에서 생성된 이런 이야기 방식은 식민지 국가였던 서구의 사회가 결핍하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정복'와 '지배'의 서사를 대체할 만한 대안서사라고 생각합니다. 전세계인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2025) 역시 자기 극복의 서사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동화집에는 증오와 수치에 매몰되지 않고 당당하게 자존감을 지켜나간 인물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아이들의 놀림에도 사람좋게 웃던 방구아저씨는 지지리 고생만 하다 먼저 간 아내에게 처음으로 선물로 준 괴목장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습니다.('방구 아저씨')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받은 아버지를 둔 가즈오는 일본의 기만을 깨닫고 자신이 '조센징'이라 부르며 비난했던 친구 진석에게 자신이 숨겨온 조선인 이름 송윤강을 알려 주었습니다.('남작의 아들') 순이 엄마는 광복이 되자 자신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데라우치 선생에게 복수하려는 남편이 살인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딸 순이를 시켜 선생을 피신하도록 했습니다.('긴 하루') 친구들이 '조센징'이라고 놀려서 괴로워 하던 재일교포 소녀 사치코는 친구 유리코에게 앞으로 그런 멸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앞으로 자신을 김행자라고 불러달라고 선언했습니다.('흙으로 빚은 고향')

 



비판적 역사 읽기를 위하여

재일교포 소녀 사치코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아빠는 8.15를 '우리'가 해방된 날이라고 했는데, 야마모토 선생님은 '우리'가 미국 때문에 전쟁을 끝낸 날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소녀 사치코는 어떤 '우리'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요? ('흙으로 빚은 고향') 이처럼 역사는 단순히 흘러가버린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집단의식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집이 현재 일본의 이야기인 '마사코의 질문'을 맨 마지막에 배치한 까닭도 현재를 형성하고 있는 역사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현재 역사를 단순한 지식이나 교양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한국사건 세계사 건 간에 역사적 지식은 밥 벌이를 하는데 실용성이 떨어지는 학문으로 치부하거나 굳이 몰라도 상관없는 불필요한 앎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이기적 기술자들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건들이 횡행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앎은 나와 세계를 폭넓게 이해하고,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토대적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에게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인 '위인전'을 읽혀 그들을 본받도록 했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말한 '기념비적 방식'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과거 조상들이 물려준 모든 것은 골동품처럼 소중한 것이니 아끼고 돌봐야 한다는 태도는 '골동품적 방식'으로 역사를 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비판적 방식'의 역사를 말했는데, 이것은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과거이기 때문에 역사는 끊임없이 비판되고 부정되어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역사가 창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기억으로서의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니체식의 비판적 역사 읽기를 통해 끊임없이 비판받고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집단기억으로서 역사는 영구불변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기다양한 역사적 전통들 중에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냐에 따라 변화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국난극복의 역사를 현재로 소환할 수도 있고, 세계와 활발히 교류하며 찬란한 문화를 형성한 전통을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또 현재의 우리를 가로막는 불의한 힘들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온몸으로 저항한 역사를 환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점은 역사를 비판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태도를 어린 시절부터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적 목적을 위해 역사동화는 역사책을 보완할 수 있는 훌륭한 교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