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디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자립준비청년'이다
우연히 아름다운 재단에서 제작한 '열여덟 어른' 프로젝트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육원 같은 보호시설에서 지내다 만 18세에 달하거나 보호조치가 종료되었을 때, 해당 시설을 퇴소한 아동을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이라 합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자립정착금으로 300만원에서 1000만원(지역별로 상이)과 자립 수당 30만원(보호 종료 후 3년까지)을 지급받고 홀로 살 집을 찾고 생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받는 정부 지원금은 홀로 생계를 유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부모가 있더라도 자립이 어려운 한국의 사회 현실에서 대부분 대학도 나오지 못한 보호종료아동들을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로 내모는 것은 거의 심연과 같은 깊은 수렁 속으로 떠미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보호해줄 어른도, 믿고 의지할 친구나 혈육도 없고, 생존에 필요한 교육이나 기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그래서 해당 캠페인은 '열여덟 어른'들이 겪게 될 경제적 고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정서적 지지 체계와 사회적 네트워크를 갖출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열여덟 어른' 캠페인 광고 속 청소년들은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제루샤 애벗(애칭 '주디')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열여섯 살이 넘으면 고아원을 떠나야했지만 그녀는 공부를 아주 잘했기에 고등학교를 마치는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그녀의 글재주를 알아본 마음씨 후한 이사님 덕택에 대학을 마칠 때까지 기숙사비와 등록금은 물론 용돈까지 후원받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찾아온 행운은 매우 희귀하고 예외적인 것이었는데, 당시 대부분은 장학 지원금은 남자 아이들에게만 시혜되었고 여자 원생들은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그 은혜를 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 소설은 가난한 고아 소녀가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서 팔자를 펴게 된다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아류로 읽혀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피상적 독해 방식은 여성 주인공이 독립적 주체로 자립하기 위한 고군분투와 그를 통해 도달한 여성으로서의 자기인식을 송두리째 폐기하고, 오직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이란 결론에만 주목한 결과입니다. 그보다는 주디 이야기를 자립준비청년의 성장담으로 읽을 경우 그 동안 우리가 이 소설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다른 세부사항들을 포착할 수 있게 되어 새로운 독서 경험에 이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세상의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주디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애벗'이란 성은 리펫 원장이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다 아무렇게 고른 것이고, '제루샤'란 이름은 묘비에서 본 것을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나은 '주디'라는 애칭도 사실 함께 고아원에 있던 아이가 말을 제대로 배우기 전에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주디'라는 이름도 "가족의 사랑을 받아 응석받이가 된 예쁜 파란 눈을 가진 소녀,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아온 소녀"에게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는 점에서 주인공에게 정확하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에 대한 주인공의 이런 불만은 사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감의 표현입니다. 고유명사로서 이름은 해당 지칭 대상이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무성의하게 아무렇게나 붙여진 이름은 그 지칭 대상의 고유성을 위태롭게 하고 존재의 의미마저 의문시합니다. 게다가 주변 친구들은 이름만 들어도 특정 가문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에서 '제루샤 애벗'이란 이름은 그녀에게 드리워진 '고아원'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상기시킬 뿐입니다.
대학 생활을 하며 주디를 힘들게 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친구들과 '노는 것'이었습니다. 주디는 다른 친구들은 이미 다 읽은 <작은 아씨들> 같은 책들을 읽지 않았고, 자신만 빼고 모두들 아는 이야기를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주디는 대학 초반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전 이 세상의 이방인이고,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요. 비참해요."
하지만 주디의 매력은 자신의 출신과 상황을 날카롭게 인식하면서도 결코 쉽게 절망에 빠지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디는 친구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비참하다고 고백한 편지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제가 등을 돌리고 기억을 외면할 수만 있다면, 다른 애들처럼 괜찮은 여학생이 될지도 모르죠. 저는 근본적으로 정말 차이가 있다고는 믿지 않거든요. 아저씨는 어떠세요? 어쨌든 샐리 맥브라이드가 저를 좋아해요!"

세상은 나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이 되어 주디는 샐리 그리고 팬들턴 가문의 줄리아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고아원 출신이 펜들턴 집안 아이와 같이 산다는 사실에 감격해 하며 민주주의 국가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감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점차 자신이 상황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삶의 주도하고 있음을 체감하며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주디의 이런 변화는 우선 자신을 후원하는 키다리 아저씨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나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고 믿을 때, 그 작은 믿음만으로도 세상은 덜 외롭고 견딜 만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주디는 자신이 유일한 가족으로 받아들인 키다리 아저씨를 디딤돌로 삼아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용감히 나아갔습니다. 여기에 샐리와 줄리와의 우정도 줄리가 결핍된 부분을 채워가는데 한몫을 했습니다. 주디는 그들의 집이나 농장에서 함께 방학을 보내며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주디를 새로운 차원의 자기 인식으로 인도했습니다. 이 책이 쓰여진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여성의 참정권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흑인은 1870년 헌법으로 참정권을 보장받았지만, 여성은 그 후 50년이 지난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서야 참정권을 인정받게 됩니다. 주디는 여성들의 권리를 확보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자신을 더 이상 고아가 아닌 사회적 존재로 재발견하게 됩니다. 급기야 주디는 존 스미스에게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단히 쓸모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릅니다. 동료 여성들과의 연대를 경험하며 주디는 누군가에게 경제적 혹은 정서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수동적 존재에서 공동체 속에서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주디는 장학금을 받거나 개인 과외를 통해 키다리 아저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보내준 용돈을 정중하게 거절하며 남긴 말은 돈에 대한 주디의 성숙한 인식을 잘 보여 줍니다. "제게 지나친 호사를 누리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사람은 누려 보지 않은 것은 아쉬워하지 않지만, 일단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것 없이는 살기 어렵게 된답니다.(....) 하지만 세상은 제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고 처음부터 분명히 그렇게 말했죠. 저는 신용으로 무엇인가를 빌릴 권리가 없어요."
대학 생활이 거의 끝날 무렵 주디는 처음보다 한층 성숙한 인식에 도달했습니다. "처음 대학에 왔을 때는, 다른 친구들이 누린 정상적인 유년기를 빼앗긴 것 같아서 몹시 분개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고아원 생활이 독특한 모험으로 생각되거든요. 고아원 생활은 제게 비켜서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해 주었어요. 다 커서 나오고 보니, 부족함 없이 성장한 사람들에겐 결코 없는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자신의 불행한 유년기와도 화해하고, 불화했던 세상과도 타협할 줄 알게 된 주디는 이제 인생의 매 순간 행복하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아무리 속상한 일이 생기더라도 계속 행복할 거라고 말할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누구를 향한 편지였을까
이 소설은 '존 스미스'라는 가명을 쓰는 익명의 후원자에게 주디가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수신자의 응답이 없이 주디가 보내는 일방적 편지들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마치 소설 전체는 주디의 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주디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그녀의 일상을 쫓아가며 그녀가 전달하는 사연에 함께 울고 웃으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주디라는 고아 소녀에 무심했던 독자라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그녀를 응원하고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 책의 출간 이후 자립준비청년들에 대한 사회적 후원이 늘었다는 것을 보면 소설가의 탁월한 글쓰기 전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디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은 그녀의 인식 수준에서 정보가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궁금증을 자아내던 존 스미스의 정체가 저비 도련님이었다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에 발견하고 놀랐을 때 독자들 역시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어느 정도 그의 정체를 예감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디가 꾸준히 이성에 대한 관심을 표현해온 대상은 저비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독자들은 주디가 샐리의 오빠 지미 맥브라이드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때마다 존 스미스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웃음을 지었을지 모릅니다. 그건 저비가 그녀에게 질투심을 표현한 것인데 그녀는 도통 그 사실을 모르고 난감해 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압권은 그녀가 저비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를 존 스미스에게 상세히 밝혔던 장면입니다. 존 스미스를 여자아이에 관심 없는 나이 지긋한 중년신사로만 알고 있던 주디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실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귀여운 실수 덕택에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려 마침내 사랑에 도달할 수 있긴 했지만요.
어쩌면 주디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썼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가 간절했던 그녀에게 존 스미스는 그저 몇 푼의 돈과 꽃다발로 그녀가 갈구하는 애정을 대체하려는 무심하고 냉정한 사업가로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녀는 그런 그와 애써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키다리 아저씨'란 애칭으로 부르며 살갑게 군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녀는 너무나 외로웠던 나머지 자신이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허구적 캐릭터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녀를 성장시킨 원동력은 글쓰기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대답 없는 수신자를 향해 4년 내내 글을 쓰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거듭해왔던 것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고 자신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그녀는 그 누구보다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내면을 벼려낼 수 있었습니다. 삶 전체를 문학으로 만들었던 카프카처럼 고독한 영혼에게 글쓰기는 미래에도 유용한 구원의 수단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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