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는 왜 호랑이를 피해 도망가지 않았을까
산 밑에서 팥을 심고 있던 할머니에게 갑자기 황소만한 호랑이가 나타나 잡아먹겠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호랑이에게 팥농사를 다 지어서 팥죽을 쑤어먹을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애원했고, 그러자 호랑이는 산 속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가 버렸습니다. 대체 왜 호랑이는 할머니를 곧바로 잡아먹지 않고 사라진 것일까요?
수천 년 간 우리 민족과 산천을 공유하며 생사를 함께 해온 호랑이에 대해 우리 조상들은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듯합니다. 예전 비디오 테이프를 시청할 때 맨 먼저 등장하는 경고에서 호랑이에게 당한 화를 뜻하는 호환(虎患)은 마마나 전쟁 등과 더둘어 가장 무서운 재앙으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옛날 사람들은 호환의 희생자는 호랑이의 시중을 드는 노예 귀신인 창귀(倀鬼)가 되어 다른 사람을 호랑이의 먹잇감으로 삼게 한다고 믿어서 결혼이나 제사와 같은 주요 행사에도 차별을 겪었다고 합니다. 다른 한편 호랑이는 그 힘과 용맹함 때문에 영험한 동물로 대접받았고, 산을 수호하는 산신령이나 산군으로도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그림이나 부적 등에 새겨져 나쁜 기운을 막는 벽사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호랑이는 약하고 힘없는 할머니를 괴롭히는 악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는 할머니의 팥죽을 먹고 싶어서 그녀의 죽음을 잠시 유예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당장 그녀를 잡아먹는 것보다는 1년간 그녀가 노동을 통해 생산해 낸 수확물을 함께 빼앗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계산이 앞선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그녀의 목숨과 재산을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든 빼앗을 수 있다고 확신할 만큼 권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동화 속 호랑이는 탐관오리의 전형적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에게는 1년이란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왜 도망을 가지 않고 호랑이를 순순히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자식이나 남편도 없이 혼자 화전(火田)으로 산을 일구어 겨우 입에 풀칠 할만큼 수확을 거두어 생존을 이어가는 할머니의 처지에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처음부터 다시 터전을 개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또 그곳에서 만나게 될 관리가 지금보다 더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도망을 가서 죽거나, 이곳에서 호랑이에게 죽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성어와 의태어로 익히는 감각적인 우리말
우리말에는 사물의 소리를 모방한 의성어와 사물의 상태나 모양을 모방한 의태어가 발달해 있습니다. 사전에 등재된 35~40만 어휘 중 이들이 15,000개 이상이나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오감을 이용해 만들어진 이러한 어휘들이 풍부하다는 것은 곧 우리 조상들이 이 세상을 그만큼 다채롭고 섬세하게 지각하고 받아들여 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사물과 자연이 내는 다양한 소리들을 익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양한 음성 상징을 알면 알수록 그만큼 더 구체적이고 생동감있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국어에서 의성어와 의태어는 주로 반복되는 구조로 되어 있어 독특한 리듬감과 운율을 만들어 냅니다. "개구리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개구리 닁큼 뛰어 도랑으로 가 보니" 등의 문장처럼 적절하게 사용된 맛깔스런 음성 상징들은 신선한 멜로디로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워 줍니다.(백석의 <개구리네 한 솥밥> 중에서)
(가) 그 때 자라가 엉금엉금 기어와.
(나) 조금 있으니까 밤톨이 떼굴떼굴 굴러와.
(다) 다음에는 맷돌이 왈강달강 걸어와.
(라) 다음에는 쇠똥이 어기적어기적 기어와.
(마) 다음에는 지게가 겅중겅중 걸어오고 멍석이 도르르르 굴러와.
이 동화에서도 각 사물에 어울리는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느린 자라는 '엉금엉금' 기어 오고, 동그란 밤톨은 '떼굴떼굴' 굴러 옵니다. 무거운 돌로 된 육중한 맷돌은 자꾸 부딪치며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왈강달강' 기어옵니다. 긴 다리의 지게는 '겅중겅중' 걷고, 돌돌 말린 멍석은 '도르르르' 굴러서 들어 옵니다. 아이들에게 각각의 사물이 되어 어떤 모습으로 들어오는지 몸으로 표현해 보도록 하면 단어가 뜻하는 바를 온몸으로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림을 보며 이야기 속으로
이 책의 삽화를 그린 박경진 선생의 그림은 사실감이 넘치면서도 유머러스해서 아이들이 즐겁게 책 속으로 몰입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특히 할머니의 생활 환경을 알 수 있게 정교하게 그려진 다양한 전통 물건들은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전해줍니다.
할머니는 키를 이용해 팥을 까불러 골라내고, 그렇게 걸러진 팥은 멍석 위에 차곡하게 쌓이고 있습니다. 뒤집어 놓은 시루 위엔 옥수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 옆 장독 위에 놓인 소쿠리에서는 잘 익은 붉은 고추가 가을 햇살을 흠뻑 빨아들이며 말라가고 있습니다.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감나무에서는 할머니가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을 까치가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의 지붕은 특이하게 나무껍질을 얼기설기 엮은 뒤 돌덩이를 얹어 놓은 너와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할머니가 기와를 얹을 만큼 부유하지도 않고, 또 짚이나 갈대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들판 근처에 살고 있지 않고, 산지에서 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시렁 위에 아무렇게 올려진 그릇들과 소반, 궁색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부엌은 궁핍한 그녀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라가 엉금엉금 기어나온 커다란 물항아리 근처에는 그녀가 물을 가득 채우기 위해 몇 번이고 머리에 이고 갔을 똬리와 물동이가 다소곳이 놓여 있습니다.
아이들과 동화책을 읽으며 함께 읽어야 할 것은 글자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 실린 그림 역시 함께 읽어야 할 대상입니다. 밤의 껍질을 까지 않은 채 아궁이에 넣으면 밤이 폭발하듯 튀어오른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왜 밤톨이 호랑이의 눈을 찌르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잘 말린 쇠똥을 땔깜으로 썼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왜 호랑이가 부엌에 놓인 쇠똥을 밟고 넘어지게 되었는지 가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궁핍한 삶에서도 까치를 위해 까치밥을 남겨 놓을 만큼 넉넉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왜 그녀가 그녀의 손때가 잔뜩 묻은 작고 보잘것 없는 물건들에 팥죽을 대접했는지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이 전하는 지혜
할머니 혼자서였다면 크고 힘센 호랑이를 결코 물리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약하고 힘없는 미약한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서로 힘을 모으고 지혜를 합친다면 무섭고 힘센 강자를 몰아내는 일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지혜가 이 동화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하필 팥죽을 한 그릇씩 나눠 먹었을까요?
붉은 팥죽은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가 되면 우리 조상들이 넉넉하게 만들어 이웃과 나눠먹던 음식입니다. 동장군이 기승을 떨치는 시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소하면서도 달큰한 팥죽은 엄동설한을 잠시 잊게 만드는 엄마의 따스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자, 그 붉은 기운으로 액운을 쫓고 가족의 안녕을 염원하던 세상의 모든 평범한 이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별미였습니다. 즉 팥죽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위로하고, 서로 덕담을 나누며 새 희망을 함께 꿈꾸었던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팥죽 한 그릇으로 하나가 되어 기꺼이 할머니를 위해 힘과 지혜을 모았고, 그 흉폭한 호랑이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대단한 것이든 변변치 못한 것이든 이웃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며, 더우기 궁핍한 시기에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 때 오히려 함께 살아 남을 가능성이 있다는 깨달음은 작은 팥죽 한 그릇이 전하는 큰 지혜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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