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시 수업

시로 쓴 '중2병'

ddolappa72 2026. 9. 27. 20:00

사춘기 청소년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더 이상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어른도 아닌 인생의 한 시기를 우리 사회는 흔히 '중2병'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중2병'이란 일본어 ‘추니뵤’(中二病)에서 나온 신조어로 사춘기 청소년들의 불안정하고 반항적인 심리 상태를 빗댄 말입니다. 왕성한 신체의 발달로 폭력성이 극대화되고, 분출되는 호르몬 분비를 통제하지 못해 반항심과 허세가 최고조에 이르는 이 시기 청소년들의 독특한 심리 상태와 행동 양식은 성인들의 눈에 '병적인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청소년기를 일종의 질병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 시기 청소년 전체를 비정상적인 집단으로 낙인찍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신조어로 인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인생의 한 과정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법할 시기 전체를 일탈과 불법의 온상으로 치부해버리면서도, 그 책임을 온전히 청소년들에게 전가하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폭력적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최소한 이해해보려는 노력조차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사춘기 청소년의 예민한 반응, 갑작스러운 반항, 대화 거부 등은 아이의 뇌가 어른의 뇌로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춘기에는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전두엽이 재정비되는 반면,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는 먼저 활성화되기 때문에 쉽게 예민해지고 부모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의 뇌에서는 추론과 의사결정 같은 복잡한 인지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뇌가 재정비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초기 발달과정을 거치면서 무성해졌던 불필요한 가지들이 제거되는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가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두꺼워졌던 회백질의 밀도가 꾸준히 감소하게 됩니다. 충동 억제와 사전 계획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복잡한 인지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인의 뇌로 성숙하는 과정에 진입하게 됨으로써 청소년은 흔히 자신의 행동이 낳을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바버라 스트로치/강수정 번역, 십대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해나무)

하지만 뇌과학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반항적인 심리 상태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할 뿐 '중2병'으로 명명되는 다양한 병리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타인에 대한 공격적 성향, 무기력증, 청소년 비행, 다양한 증독 증상 등은 산업구조의 변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상용화, 치열한 입시 교육환경, 사회성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제도 등 오늘날 청소년들이 놓인 적대적 사회 환경과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춘기 특유의 반항심과 허세를 '중2병'으로 뭉뚱그리고 조롱하는 대신, 십대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한편, 가끔은 적극적으로 성인들이 개입해서 십대들의 '전두엽'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들이 십대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종종 이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을 들여다 보는 '창'이자 마음을 비춰 보는 '거울'로서 시

초등학생들이 써 온 시와 중학생들이 써 온 시를 비교해서 읽으면 뚜렷한 심리상태의 변화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초등학생 시절 세상을 바라보던 그 순박하고 순진하던 눈망울들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허세와 불만으로 가득찬 채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는 여드름 투성이들이 거들먹거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다행인 점은 '시'를 통해 꼭꼭 숨겨둔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창'인 셈입니다.

서로가 써온 시를 돌려 읽으며 중학생들은 미처 몰랐던 친구의 마음을 알아채기도 하고, 자신이 써온 시에 대한 친구들의 코멘트를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충고는 잔소리 같아서 귀를 닫게 되지만, 친구들의 진심이 담긴 장난스런 멘트에는 슬며시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는 미처 몰랐던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가) 탓

친구랑 싸웠다
내 탓
우리 반이 선생님께 혼났다
내 탓
기다리던 버스가 지나갔다
내 탓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 탓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다
적어도 누구를 원망할 필요는 없으니까
(중2 남학생A의 시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립니다. 친구와 싸운 것도, 반 전체가 선생님께 혼난 것도, 기다리던 버스를 놓친 것도, 심지어 할머니의 죽음도 자신의 탓이랍니다. 그런데 그 까닭은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은 적어도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이 학생의 시를 얼핏 '내 탓이오'를 외치는 천주교의 기도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미사 중 자기 잘못을 뉘우치겠다는 고백의 기도로, 이것은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며, 무엇보다 남이 알지 못하지만 스스로 지은 죄를 신 앞에 겸허히 고해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가 외치는 '내 탓이오'는 이러한 겸허함과는 거리가 먼, 자의식 과잉 상태의 청소년이 책임을 회피하려는 기만적 태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의식(self-consciousness)은 본인의 감정이나 생각, 동기에 대해 인식하는 것과 관련된 내면적이고 성찰적인 특성을 갖는 사적 자의식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공적 자의식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기는 이 자의식이 비대해지는 경향을 나타내며, 그래서 이 시기 청소년들은 유난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사적 자의식이 강할 경우 다른 사람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외골수의 고집쟁이가 되는 반면, 공적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주관이 전혀 없이 타인에 의존하는 평판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으로 소급하면서 강한 책임감을 드러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마치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앙의 근원으로 상승시킴으로써 과잉된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내 탓'이라는 외침은 타인으로부터 '원망'을 듣지 않으려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자유롭고 싶은 욕구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의식 과잉은 실제로는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많으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을 검열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출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깊이 탐색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외로움 대신 고독을


(나) 하염없는 기다림

홀로 우산통에 덩그러니 남은 우산 하나
친구들이 주인의 품으로 돌아갈 때
묵묵히 주인을 기다리는 우산
비오는 날만 되면 많은 우산들은 주인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데리러 올거라는 확신을 갖은 채
하염없이 기다린다
부모님이 데리러 오는 걸 기다리는 유치원생처럼
홀로 그 자리를 지키며 주인을 기다리는
잃어버린 우산들
(중2 남학생B의 시 전문)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사물에 문득 시선이 머무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 시의 화자에게 '잃어버린 우산'은 자신의 홀로있음을 상기시키는 물건입니다. 아마도 시인이 이미 외로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주인을 잃어버린 우산'에 감정이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우산들이 유치원생처럼 순진하게 주인이 자신을 데리러 올거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우산을 주인이 의도적으로 '버린' 것이 아니라 우연히 '잃어버린' 것이라고 씀으로써 주인과 우산 간의 끈끈한 정서적 연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춘기에 접어든 시인이 부모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획득했고 그로 인해 약간의 외로움도 느끼고 있지만, 여전히 부모님과 확고한 정서적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불가피하게 어떤 질문을 묻도록 합니다. 우산의 '하염없는' 기다림은 주인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표현하지만, 그 기다림이 '하염없이' 연기되어 결국에는 주인과 우산이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경우, 시인은 우산이나 주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요? 외로움이란 감정이 본인이 원하지 않았지만 혼자가 된 상태에서 느끼는 고통이라면, 고독은 스스로 독자적 삶을 살기로 선택한 자율적 주체가 겪게 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여전히 부모의 보호 아래서 제공받는 안락함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시인은 과연 '하염없는 기다림' 끝에 외로움과 고독 중 어떤 정서를 선택하게 될까요?


청춘이여, 이카루스의 노래를 불러라

(다) 농구

거친 심장소리와 흐르는 땀
가장 높은 점프
라인 앞에서
내 손끝을 떠난 주황색 농구공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로 날아간다.

그 희망은, 그 과녁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몇 번이고 공을 튕겨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촤악, 공이 그물을 가른다.

수백 번 슛을 실패하고
두 번이나 넘어졌지만
이 열매는 끊을 수 없다.
(중2 남학생C의 시 전문)


청춘은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소한 일에 자신이 가진 모든 열정을 불사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의 화자 역시 비록 "수백 번의 슛을 실패"했지만 단 한 번 "공이 그물을 가"를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의 "열매"를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청춘은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그 단 한 번의 성공이 주는 행복감에 대한 기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자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찮거나 사소해 보이는 일에 몰두한다고 무시당하고 풋나기라 조롱받더라도, 자신이 가치를 발견하고 선택한 그 일에 최선을 다 했을 때 만끽할 수 있는 향락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영원히 청춘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마치 농구를 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전성기라 고백했던 만화 <슬램 덩크>의 주인공 강백호가 영원한 청춘의 표상으로 기억되듯이 말입니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목숨을 잃고 만 이카루스를 어리석은 청춘의 만용으로 비난하는 건 전적으로 부당합니다. 그런 무모한 열정 덕택에 우리는 중력에서 벗어나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게 되었고, 태양계 저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청춘의 진정한 가치는 어른들이 정해놓은 규범과 질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에 빛나게 됩니다. 그 찬란한 순간을 위해 오늘도 늠름하게 이카루스의 노래를 부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숨을 죽인 채로
멍하니 주저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자,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려 보자,
저 먼 곳까지, 세상 끝까지.
자, 힘차게 날개를 펴고 날아 보자,
하늘 끝까지, 태양 끝까지."
(자우림의 노래 '이카루스' 중에서)


이제는 보조바퀴 없이 달리고 싶어

(라) 보조바퀴

비틀비틀 쓰러질까
뒤에서 붙잡아주던
작은 손길
그렇게 달리던 자전거
다음 경주를 향해
우린 이별할 시간
흔들흔들 쓰러지려다가도
이젠 잘 달리네
(중2 여학생D의 시 전문)

청소년기는 여전히 부모의 보호 아해 있으나 심리적으로는 부모에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기 때문에 '심리적 이유기'라고도 합니다. 이 시의 화자에게 자신의 자전거를 붙잡아 주던 부모의 보호는 "작은 손길"로 인식되고, "다음 경주를 향해" 그 손길과 작별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화자는 부모의 도움을 '작게' 느낄 만큼 이미 충분히 성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화자는 비록 "흔들흔들"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어떤 도움없이도 '잘 달릴' 수 있다고 낙관합니다. 그래서 유년의 상징인 '보조바퀴'를 떼어버린 채 스스로의 힘으로 질주해보겠다고 선언합니다. 말 그대로 이 시는 부모님에 대한 일종의 독립선언문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아직 이별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작별을 통보받는 상대의 입장도 헤아려 보았으면 합니다. 어렸을 때는 자기 주장만 내세워도 용납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도 진지하게 고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부모님과 나 사이에 적당한 타협이 이루어져 서로 평화를 유지하게 될 경계선을 긋게 되기까지 수없이 반복되는 투쟁의 나날을 보내게 되겠지만, 그로 인해 본인도 수많은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만, 당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들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된다는 사실은 항상 명심했으면 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이런 충고를 남길 수 있는 까닭은 나 역시 그런 어리석은 시간을 한참이나 보낸 뒤에야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기 때문이랍니다. 또한 당신이 홀로 질주하는 자전거를 길가에서 구경하면서 열렬히 환호성을 지르는 목소리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