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교육

[융합 수업_중3] 불도저 시장 김현옥

ddolappa72 2026. 5. 16. 22:26

 

 
현대 서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서울은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선사시대부터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다양한 역사적 층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강동구 암사동은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지이며, 송파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한성 백제 시기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서울은 1394년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후 600년 넘게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등 수많은 건축물들이 현대적 고층 빌딩들과 공존하며 그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은 오스만 남작의 파리 재정비 사업을 그대로 적용한 도쿄를 모방해서 근대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식민 통치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르네상스나 네오클래식 양식에 따라 조선총독부,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같은 거대한 건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1925년에 완공된 경성역(현 문화역서울)은 근대적 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명동 일대에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 본점)이 들어서며 근대적 소비 문화가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 소설가 구보가 거닐던 청계천, 종로, 화신백화점, 조선은행, 경성역 등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1930년대 경성의 풍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처럼 서울이란 도시는 수많은 시간의 지층들이 두텁게 쌓인 토대 위에 세워진 기억의 공간입니다. 과거가 남긴 유적지와 시간의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건축물들은 잊혀진 기억의 매체들로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지속적으로 간섭하고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적 층위를 보존하고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데 필수적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서울의 모습은 언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일까요? 1967년 대통령 재선을 노리는 박정희에게 서울의 변화된 모습은 자신이 내건 '근대화'의 성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주민 반발과 예산 부족을 이유로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는 서울 시장 윤치영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던 박정희는 부산 시장 김현옥을 주목했습니다. 김현옥은 역전 부두지구 구획정리사업을 비롯해 부산 곳곳에 도로를 뚫고 확장하는 역사를 벌여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울 시장에 취임한 김현옥은 행정의 우선 순위를 건설에 두었습니다. 1966년 시 예산의 10%에 불과하던 건설 예산을 50%로 확대했고, 이듬해에는 그 비율을 75%까지 높였습니다. 

불과 40세의 야심만만한 젊은 행정가는 헬멧에 ‘돌격’이라 적고 현장을 누비며 대규모 공사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오늘도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광화문 지하도, 명동 지하도를 포함해 숱한 지하도를 만들었고, 청계고가도로를 세우고 남산 1,2호 터널을 뚫었고, 밤섬을 폭파하고 여의도를 개발했고, 시민아파트와 세운상가를 건설했습니다. 북악스카이웨이와 강변로도 그의 작품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의 골격을 이루는 주요 사업 대부분은 그가 재임기에 속도전으로 밀어붙였던 것들입니다. 따라서 현대 서울의 탄생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김현옥 시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966년 4월. 세종로지하도 설치공사 기공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66년 4월29일. 세종로 지하도 공사 현장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68년 5월31일 청계천 고가도로 공사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속도는 정치다

1966년에 개통된 광화문 지하도는 총길이 154m에 이르는 짧지 않은 구간임에도 단 5개월여 만에 공사를 마무리지었습니다. 상습 침수지구라서 사람이 살기 어려운 땅이었던 여의도를 높이 15m의 제방(윤중제)을 쌓아서 90만 평의 택지로 변모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10일 정도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토목기술이 거의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렀는데도 그런 역사가 가능했던 건 김현옥의 밀어붙이기식 불도저 행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현옥은 박정희가 자신의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조국 근대화'라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건설을 두려워 말라."는 박정희의 부름에 "건설은 나의 종교"로 화답했던 것입니다.

김현옥의 서울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였습니다. 재선을 목전에 둔 박정희에게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한 서울시만큼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는데 좋은 전시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의 현대화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지상 과제였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한국 전쟁 직후 공습으로 초토화된 평양을 재건하면서 남한보다 앞서 아파트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도입한 조립식 건축기법과 시멘트 공법을 이용하여 다수의 공동주택을 건설하며 '인민의 낙원'이라는 체제 선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에 뒤쳐져 있다는 사실은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을 위태롭게 했으며, 따라서 빠른 속도로 체제의 우월성을 확보하는 것만이 생존의 안전성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비릴리오의 말처럼 그들에게 "속도의 폭력은 법이 되었으며, 세계의 운명이자 세계의 목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폴 비릴리오/이재원 번역, 속도와 정치, 그린비)

속도는 단지 서울을 개발하는 방식에 국한되지 않고 그 자체가 도시의 목적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자동차의 흐름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인파의 흐름은 지하도로 유인함으로써 사람이 사라진 텅빈 도로 위를 차량이 막힘없이 질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시내 곳곳의 병목현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기획된 고가도로는 단순히 도심과 외곽을 연결시켜주는 교통로가 아니라 눈부신 성장을 가시화하는 획기적인 시설물이었습니다. 즉 지하도와 고가도로는 속도 그 자체를 과시하는 구조물인 셈입니다. 중요한 점은 속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됨으로써 도시 개발의 본질적 목적이자 대상이어야 할 시민들 자체가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속도에 대한 집착은 서울 개발이 일종의 군사 작전처럼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군인 출신의 시장은 또다른 군 출신의 대통령으로부터 서울 개발을 하달 받았고, 그래서 군에서 총동원령을 내리듯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도시 개발을 마치 전시 작전처럼 전개했습니다. 서울을 일종의 군사 요새처럼 개조하려 했다는 사실은 1.21사태 이후 분명해졌습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포함한 북파 공작원 31명이 청와대 바로 뒤편까지 침입해서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던 이 사건 이후 서울 도시공간을 요새화하려는 계획이 구체화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신년사에서 '싸우며 건설하는 해'로 선포하며 북한의 위협에 구체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그 일환으로 김현옥 서울 시장은 1월17일 '서울요새화계획'을 발표했고,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남산 요새화 계획'을 내놓았씁니다. 그 핵심은 1970년 말까지 전쟁시 30~40만 명이 대피할 수 있는 지하수용시설을 마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남산 1,2호 터널이었습니다.
 



한양은 어떻게 건설되었나

한양의 설계자 정도전은 유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새로운 왕조의 수도가 될 도시를 계획했습니다. 그는 유교의 덕목인 오상에 따라 도시 전체의 윤곽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인(仁)을 상징하는 동문인 흥인지문, 의(義)를 상징하는 서문인 돈의문, 예(禮)를 상징하는 남문인 숭례문, 지(智)를 상징하는 북문인 숙정문으로 도시를 에워싸고 도시 중앙에 신(信)을 상징하는 보신각을 배치했습니다.

정궁인 경복궁은 명당의 지맥이 흐르는 백안산 아래에 건설했고, 종묘와 사직은 유교 경전인 <주례>의 '고공기'에 나오는 좌조우사(左祖右社)의 원칙에 따라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두었습니다. 육조(六曹)를 비롯한 제반 관청 건물은 관청을 궁궐 앞쪽에 배치한다는 전조(前朝)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 위치시켰습니다. 도성민이 생계를 유지하고, 궁궐과 관청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시전(市廛)은 경복궁 전면에서 약간 동쪽으로 비켜간 위치에 있는 종루 주변에 건설되었습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단순히 왕이 머무는 통치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순리, 왕권과 백성의 이상적 관계를 모두 포괄하려 했던 거대한 철학적 구조물 그 자체였습니다. 우주적 질서인 오행의 원리에 따라 세심하게 배치된 도시 공간은 조선이란 국가가 지향하는 정치적 이상이 현실에서 구체화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정도전의 한양 건설과 비교해 보면 김현옥 시장의 서울 개발이 지닌 문제점이 분명해집니다. 도시 전체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이 최고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속도전으로 밀어붙인 서울 개발에는 어떤 철학도 비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더 끔찍한 점은 공명심과 출세욕에 눈이 먼 김현옥 시장에게 서울이란 도시에 함께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1970)
성수대교 붕괴 사고(1994)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


 
불도저 시장 신기루를 세우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울은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들어 경제개발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격차가 커지자 영세한 소농들은 가족을 이끌고 도시로 이주했고, 그 대부분은 서울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개 저학력에 미숙련 상태여서 주로 영세상, 행상, 노점상, 일용직 등으로 연명하며 도시 비민층을 형성했고, 무엇보다 당장 거주할 주택이 없어서 서울의 산자락 국유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무작정 살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서울시는 서울에 판잣집이 최소 5만2543가구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고, 1966년 통계에 따르면 서울 인구 380만 명 중 3분의 1인 127만 명이 무허가 주택에 살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빈민촌과의 전쟁'을 선포할 만큼 도시 빈민 문제를 심각한 사안으로 인식했습니다. 게다가 1966년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방한했을 때 남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의 판잣집이 TV를 통해 미국에 방영되면서 "이건 나라 망신이다"라는 여론이 만들어졌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들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치우는' 방식을 선택했씁니다. 1967년 서울시는 23만 3,000 가구의 무허가 주택에 거주하는 127만여 명을 내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부는 그 중 50만여 명은 지금의 성남시인 경기 광주군(광주 대단지)으로 옮기기로 하고, 청소차와 군용차를 동원해 판자촌 주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1971년 8월10일 구호 대책과 세금 면제 등을 요구하던 광주 대단지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1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3일간 격렬한 시위를 벌이며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도로 남은 사내>는 바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집을 철거하러 온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무등산 타자' 박흥숙 사건(1977) 역시 당시의 주거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세희의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역시 이 시기 도시빈민의 아픔과 고통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김현옥 서울 시장이 도시 빈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또다른 정책은 서민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건설된 서민 아파트는 대개 산 가장자리에 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까닭은 그곳이 무허가 판자촌이 있던 곳이었고 예산 문제로 값싼 국유지인 고지대에 지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정해진 기간 내에 재빨리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 데다 원가도 턱없이 낮았고, 그나마도 중간에서 업체들과 공무원들이 떼먹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각종 시민 아파트는 날림 중의 날림으로 건설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 건설된 와우 시민아파트도 그렇게 건립된 건물들 중 하나였습니다. 70도나 되는 경사진 산비탈에 세워진 아파트는 1969년 12월26일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4월8일 봄이 되어 땅이 녹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건물을 떠받치던 기둥도 주저앉으며 결국 아파트 한 동이 산 아래쪽으로 넘어지듯이 무너져 판잣집 세 채를 덮쳤습니다. 이 사고로 아파트 입주민 33명과 전해에 깔린 판잣집 주민 1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불도저 시장' 김현옥은 서울특별시장 자리에서 물러나야야만 했습니다.

김현옥 시장이 사라진 후에도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끔찍한 사건들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1994),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2003), 세월호 참사(2014), 이태원 참사(2022) 등 살아있는 한 기억에서 잊혀지기 힘든 사건과 사고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다량의 사상자들을 발생시킨 이 모든 사건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공통된 원인은 무엇이든 빨리빨리 서두르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욕망이 아닐까요. 겉보기에 번듯한 성과를 신속하게 이루겠다는 욕심 때문에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들을 애써 외면해왔고, 그에 대한 대가로 소중한 목숨들을 희생시켜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욕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크고 작은 김현옥 시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와우 아파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의 머리 위로 무너져내릴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