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클레먼츠 / 햇살과나무꾼 번역, 프린들 주세요, 사계절

교사와 학생은 어떤 관계인가
앤드루 클레먼츠는 전업작가로 전업하기 전 7년 동안 공립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프린들 주세요> 역시 '프린들'이란 신조어를 놓고 그레인저 선생님과 학생 닉이 갈등하면서도 협력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말 안하기 게임>에서도 남학생 대표 데이브와 여학생 대표 린지 간의 침묵 대결을 학교 안에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유작인 <프린들 파일>에서도 전자책에 익숙한 현대 어린이 조시와 종이책을 선호하는 구닥다리 선생님 니콜 간의 대립과 화해를 다루면서 바람직한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즉, 작가 클레먼츠는 언어, 침묵, 새로운 미디어 환경 등 다양한 소재를 작품에 차용하고, 그러한 대상들에 대한 교사와 학생 간의 입장 차이를 갈등의 중심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구축해가는 서사적 전략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탐사하고자 하는 대상은 바람직한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책에서 '독불장군' 그레인저 선생님과 '말썽꾸러기' 닉은 그 누구도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신조어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서로 대립할 뿐입니다. 선생님은 낱말과 언어에는 나름의 규칙과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학생은 사전에 나온 말은 모두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험해 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심각한 갈등 상황으로 치닫게 되지만 서로를 증오하거 미워하기는커녕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진 신념을 쉽게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닉이 만든 신조어 '프린들'이 사전에 실리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닉이 그레인저 선생님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야기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에 남겨둔 반전은 닉의 승리가 그레인저 선생님이 의도한 결과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닉의 도전을 학생들이 고리타분한 교실에서 배운 것을 세상 속에서 실제로 실험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고, 실험의 성공을 돕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던 것입니다.
작가가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상적인 학생의 모습은 교사의 권위를 존중하면서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창의성을 펼쳐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지닌 학생입니다. 주인공 닉이 단순한 장난꾸러기로 그려지지 않고 "기발한 생각이 많고, 그 생각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 지도 잘 알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에 걸맞는 이상적인 교사는 "영원히 변함없는 가치"를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임무를 맡은 자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전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설령 그것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지라도, 학생들이 배운 것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실험에 함께 동참하고 잘 이끌어주는 역할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을 교사가 꿈꾸어온 소망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학교는 권위적 교사가 기지의 지식을 미래세대에게 일방적으로 전수하는 장소가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하는 실험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가는 창조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자의성은 자유가 아니다
닉은 그레인저 선생님에게 "'개'라는 말이 꼬리를 흔들며 왈왈 짖는 동물을 뜻한다고 누가 정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선생님을 이렇게 답했습니다. "누가 개를 개라고 했냐고? 네가 그런 거야, 니콜라스, 너와 나와 이 반에 있는 아이들과 이 학교와 이 마을과 이 주와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모두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거야." 닉은 그레인저 선생님의 대답에서 영감을 받아 펜을 '프린들'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물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흔히 닉의 착각을 언어의 자의성에 대한 설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의 자의성을 최초로 구상한 소쉬르의 의도는 이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언어를 일종의 기호(signe)로 보았고, 모든 기호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é)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기표는 우리가 입으로 소리를 내는 음성이미지, 손으로 쓴 글자, 수화의 손동작처럼 감각적으로 표현되는 물리적 형식을 뜻합니다. 기의는 기표를 지각했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념을 의미합니다.
주의할 점은 이 때 기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현실적 지시대상(le référent)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쉬르 이전까지 사람들은 언어가 어떤 구체적 현실 대상을 지칭하는 기호라고 믿었습니다. 가령, '사과'라는 언어 기호는 우리가 현실에서 사과라고 부르는 구체적 사물을 지칭하는 기호라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소쉬르는 이러한 전통적 관념에 의문을 품고 언어는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현실과 무관하게 독자적 체계를 구성하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특정 기표는 필연적으로 특정한 기의와 결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의적으로' 결합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언어의 자의성은 닉이 착각하고 있듯 인간이 마음대로 이름을 지어 붙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기표가 우연히 기의와 결합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신호등의 '빨간 불'이란 기표는 '정지하라'는 기의를 뜻하지만 차나 보행자를 정지시키기 위해 반드시 '빨간 불'을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어의 이 자의성 때문에 인류는 같은 대상을 놓고 얼마든지 다른 이름을 불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꼬리를 흔들며 왈왈 짖는 동물'을 프랑스어로 '시엥'이라 부르고, 독일어로는 '훈트', 영어로는 '도그' 그리고 한국어로는 '개'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같은 대상을 나라마다 다른 말로 부르는 것도 혼란스러운데,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 내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더 이상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 동질적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언어 사용자들은 특정한 기표는 특정한 기의와 연결된다는 약속을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는데, 이를 언어의 사회성이라 합니다. 구성원들 간에 이루어진 이 약속은 일종의 규약이나 법과 같은 지위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닉은 자신이 '프린들'이란 낱말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유행하게 된 이후에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프린들이란 단어를 만들었지만 그것을 사용할 권리는 계약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통용되던 '펜'이란 단어를 대체하는 '프린들'이란 단어를 만듦으로써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자유를 만끽했던 닉은 스스로 만든 단어에 다시 구속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상적인 사제관계란
언어에 대한 소쉬르의 통찰이 지닌 혁명성은 언어는 세계와 독립적으로 독자적인 체계를 형성하며, 그러한 언어적 체계가 역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언어란 현실 세계를 수동적으로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창조하는 도구인 셈입니다. 언어는 자의적인 방식으로 체계하되기 때문에 '꼬리를 흔들며 왈왈 짖는 동물'을 '시엥'으로 부르는 사회와 '개'라고 부르는 사회는 서로 다른 의미화 체계를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레인저 선생님의 사전에 대한 숭배를 단순히 우스꽝스런 과장으로 볼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사전이야말로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체계화시켜온 코드화된 지식들의 종합이기 때문입니다. 교사는 사전으로 상징되는 전승된 지식 체계과 가치관을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사전의 수호자이자 사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어의 자의성은 서로 반대되는 두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기표와 기의가 필연성이 아닌 자의성에 따라 결합한다는 것은 기호가 안정된 소통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구성원들 간의 약속에 따라 엄격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기표와 기의 간의 불안전성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수히 많은 기호들을 만들어서 한 사회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창조의 가능성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닉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켰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전을 고수하는 그레인저 선생님과 신조어를 옹호하는 닉의 갈등을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에서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닉의 부모님을 방문한 교장 선생님은 닉으로 인해 엉망이 된 단체 사진을 거론하며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학교 상황을 거론했지만, 교칙을 따르지 않은 학생들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는 대신 대화와 설득을 통해 부모님을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닉의 부모님 또한 닉에게 선생님들께 버릇없이 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면서도 아들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해서 교장 선생님과의 토론을 교육적으로 생산적인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어른들의 세심한 배려와 성숙한 토론은 닉이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더욱 성장할 수 있게 만든 자양분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닉은 그레인저 선생님과의 낱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쁨에 도취되어 경거망동하기보단 점차 조용하고 조심성 많은 아이로 변해 갔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기발한 생각들을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것에 아무런 꺼리낌이 없었지만, 이제는 그런 행동에는 많은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닉은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한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10년 뒤 그레인저 선생님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닉은 그 편지를 읽은 후에야 자신이 거둔 성공과 성장이 사실은 "키가 작았지만 늘 거인처럼" 보였던 그레인저 선생님의 한없는 배려와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예전에도 그리고 10년 후에도 여전히 닉을 믿고 기다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레인저 선생님 역시 닉과의 전쟁을 통해 변화를 겪었습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가치'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했던 선생님은 닉과의 언어 실험을 통해 사전도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전에 새롭게 실린 '프린들'이란 단어는 선생님과 닉이 협력해서 빚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전 자체였던 선생님은 닉 덕택에 더 풍성해진 사전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이처럼 가르친다는 행위는 가르치는 대상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 역시 함께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키곤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행위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학생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함께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실험을 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 실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사로서 권위를 포기하지 않을 만큼 완고하나 학생의 도전을 기꺼이 수용할 만큼 너그러운 교사와, 기발한 생각을 곧바로 실행에 옮길 만큼 무모하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을 만큼 겸손한 제자가 필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교육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학 진학이란 실용적인 목적을 좇다 우리가 놓쳐버린 교육적 본질이 무엇인지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여전히 독서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