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마테를링크/김주경 번역, 파랑새, 시공주니어

'파랑새'는 행복의 상징인가
'파란나라를 보았니 / 꿈과 사랑이 가득한 / 파란나라를 보았니 / 천사들이 사는 나라' 다들 가수 혜은이가 부른 동요 '파란나라'(1985)를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동심의 세계를 파란나라에 비유한 서정적 가사와 밝고 경쾌한 멜로디 덕택에 아직도 많은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입니다. 그런데 이 동요에는 '찌루찌루의 파랑새'라는 노랫말이 나옵니다. 훗날 어른이 되어서야 '찌루찌루'가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의 주인공 '틸틸(TylTyl)의 일본식 발음을 차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프랑스어로 된 원전을 번역하는 대신 일본어판을 중역하는 경우가 흔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서글픈 사실은 원래의 발음을 살려 '틸틸의 파랑새'로 고쳐 불렀을 경우 기억 속에 각인된 노래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동화 덕택에 많은 사람들이 '파랑새'를 행복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파란색은 뭔가 이국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노발리스의 동화 <푸른 꽃>에서도 파란색은 동경과 꿈을 상징하는 색채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마테를링크가 소개되기 이전에 우리 문화 속에서 '파랑새'는 공포와 슬픔을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애절한 노랫가락에 구슬픈 민요 '파랑새'는 갑오개혁 때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전봉준을 풍유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파랑새는 파란 군복을 입었던 일본군을, 녹두꽃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그리고 청포장수는 농민군을 각각 상징하고 있습니다.
한센병으로 고통을 받았던 시인 한하운의 시 '파랑새'는 또 어떤 가요. "나는 / 나는 / 죽어서 / 파랑새 되어 // 푸른 하늘 / 푸른 들 / 날아다니며 // 푸른 노래 / 푸른 울음 / 울어 예오리 // 나는 / 나는 / 죽어서 / 파랑새 되리" 이 시에서 파랑새는 부자유한 현실을 벗어나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하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소망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꿈꾸는 자유는 죽음 이후에 인간 아닌 것으로 환생한 후에나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시를 물들이고 있는 푸른 색에는 시인이 감내해야 했던 참혹한 현실의 슬픔과 한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이처럼 '파랑새'는 '행복'이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될 수 없는, 이미 우리 문화 내에서 다양한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는, 자유로운 기표입니다. 파랑새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자동적으로 행복의 상징으로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새에게서 자유를 박탈하고 새장 안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히려 파랑새를 다양한 의미의 그물망 사이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도록 내버려둘 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인간에게도 사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틸틸과 미틸 남매에게 생긴 일
우리 문화 속에 다양한 파랑새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파랑새가 누구나 갖고 싶은 행복을 상징하는 동의어가 된 데에는 전적으로 마테를링크의 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아이들이나 읽을 법한 동화로 여겼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의 <파랑새>는 6막 12장으로 구성된 희곡이며, 온갖 상징과 비유로 쓰여 있어 어른들조차 읽기가 녹록치 않습니다. 심지어 작가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사실 철학서 한 장을 번역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미 찾기를 좋아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온통 분석할 만한 것들로 가득찬 이 작품이 어린이들에게는 그저 신비롭고 황홀한 동화일 뿐입니다. 틸틸과 미틸이 파랑새를 찾기 위해 찾아가는 추억의 나라, 행복의 정원, 미래의 나라는 아이들을 매혹하고 그들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장소들입니다. 주인에게 충실한 개 틸로와 남매의 파랑새 찾기를 방해하는 음흉한 고양이 틸레트, 자애로운 빛의 요정, 소심한 빵의 요정, 화가 많은 불의 요정 등 다채로운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흥미진진한 소음과 갈등은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줍니다.
무엇보다 이야기 구조는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틸틸과 미틸 남매에게 요술쟁이 할머니 베를륀느가 방문하게 됩니다. 남매는 할머니의 어린 딸의 병을 낫게 해줄 파랑새를 찾아서 할머니와 환상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한 남매가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자신들의 초라한 오두막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행 전 건너편 부잣집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광경을 훔쳐보며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여행 후 자신의 소박한 집에 감추어진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게 이야기의 골자입니다.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하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과 정확히 같은 서사 구조입니다. 무지의 상태, 여행,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서사 구조는 예수의 부활 서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육체 안에 갇힌 그의 신성을 드러낸 사건이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무지의 상태에 있던 주인공들은 작은 죽음을 경험한 후에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틸틸과 미틸은 건너편 부잣집 아이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면서 가난 때문에 크리스마스 선물조차 받을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했습니다. 남매는 자신들의 소박한 오두막이 어둡고 비좁은데다 과자랑 케이크도 없기 때문에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요술쟁이 할머니는 "너희들 집이 훨씬 아름다워. 너희가 제대로 볼 수 없을 뿐이지... "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남매는 건너편 부잣집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집에 가득찬 행복을 볼 수 없는 맹목의 상태에 놓였던 것입니다. 사물들의 본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없던 남매는 요술쟁이 할머니가 갖고 있던 초록색 마법의 모자를 통해 익숙한 주변 사물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모자를 쓰고 모자에 달린 다이아몬드를 돌리자 요술쟁이 할머니는 아름다운 공주로, 초라한 오두막 벽은 사파이어처럼 파란 빛을 띠는 투명한 돌로 변했고, 벽시계, 빵, 설탕 등 주변의 사물들 속에 갇혀 있던 요정들이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환상의 나라로 여행을 다녀온 남매는 신비한 모자의 도움 없이도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꿈 속 여행은 일종의 죽음의 경험이라 할 수 있는데, 남매의 엄마는 틸틸과 미틸이 하룻밤 사이에 변화한 모습을 보고 그들이 죽을까봐 걱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남매가 잠, 즉 죽음을 경험하고 새롭게 부활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 또한 예수처럼 죽음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의 상태에 있던 남매가 하룻밤 모험을 통해 께달음을 얻게 되는 희곡의 구조는 일종의 성장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희곡은 미성숙한 주인공이 모험을 겪고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전형적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랑새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기 위해 여섯 곳의 신비한 장소를 방문했습니다. 추억의 나라에서는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들과 식사를 했습니다. 밤의 궁전에서는 전쟁, 질병, 유령, 어둠과 공포를 만났습니다. 숲속에서는 떡갈나무, 너도밤나무, 느릅나무, 보리수 등 나무들의 영혼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공동묘지를 거쳐 도달한 행복의 정원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행복들을 만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하늘궁전인 미래의 나라에서는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하는 수많은 아기들에게 에워싸이기도 했습니다.
이 중에서 행복이란 주제와 연관해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행복의 정원입니다. 그곳에는 의인화된 다양한 행복들이 등장합니다.
(가) 사치스런 행복, 소유하는 행복, 허영심이 충족되는 행복, 목마르지 않아도 마시는 행복, 배고프지 않아도 먹는 행복,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행복,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행복,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복, 잠만 자는 행복, 시도 때도 없이 웃는 행복
그런데 틸틸과 미틸이 처음으로 만났던 행복들은 사물들의 진실을 드러내는 다이아몬드의 빛을 비추자 만족스런 표정의 가면들이 다 찢겨나간 채 땅에 떨어지고, 행복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 채 바람 빠진 고무풍선마냥 초라하고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거짓 행복들이었던 셈입니다.
(나) 정의의 기쁨, 선하게 사는 기쁨, 일을 마쳤을 때의 기쁨, 생각하는 기쁨, 깨달음의 기쁨, 아름다운 것을 보는 기쁨, 사랑하는 기쁨, 인간이 미처 모르는 기쁨들, 모성애
고차원적인 '커다란 기쁨들'도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정의, 진리, 선, 아름다움 등이 의인화된 기쁨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안에 모성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성애는 아이들의 미소와 입맞춤으로부터 힘과 젊음을 얻기 때문에 결코 가난해지지도 않고 추해지지도 않는 존재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사랑은 모든 기쁨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며, 항상 풍요로운 것이기도 합니다.
(다) 건강하게 지내는 행복, 맑은 공기의 행복, 부모를 사랑하는 행복, 파란 하늘의 행복, 숲의 행복, 햇빛이 비치는 시간의 행복, 봄의 행복, 해 질 녘의 행복, 별을 바라보는 행복, 빗방울의 행복, 겨울 난로의 행복, 투명하고도 커다란 행복, 천진난만한 생각의 행복, 이슬 속을 맨발로 달리는 행복
그런데 아직 어린 틸틸과 미틸이 찾고 있던 파랑새는 거짓 행복이나 '커다란 기쁨들' 속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먼저 '집에 있는 행복들'을 만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틸틸은 그들을 전혀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들었지? 틸틸이 자기 집에 행복이 이렇게 많이 있다고 묻는 거! 참 딱하기도 하지! 틸틸! 너희 집은 문이랑 창문이 터질 정도로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 단지 네가 그걸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거지."
집에 있는 행복들의 대장의 말처럼 틸틸과 미틸이 파랑새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행복들을 알아보는 "새로운 눈"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남매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타인의 눈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살피며 불행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곁에 있는 소중한 행복들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자신들의 초라한 오두막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남매는 그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행복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행복이 객관적으로 주어진 무엇이 아니라 행복을 찾는 자의 주관적 능력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주변의 사물들을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 다른 눈으로 관찰하고, 그 안에 숨겨진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자만이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능력은 예술가적 창조력과 유사합니다. 예술가 역시 익숙한 사물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기존의 사물을 새롭게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기 위해 환상의 나라로 모험을 떠났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습니다. 추억의 나라에 있던 새는 검게 변했고, 미래의 나라에서 가져온 새는 붉은색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추억 속에 있었던 새나 미래에 만나게 될 새는 결코 "만물과 행복의 비밀을 간직한 파랑새"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햇빛 속에서도 살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진짜 파랑새"는 오직 현재에만 그리고 여기서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건 틀림없이 내가 기르던 맷비둘기인데! 내가 떠날 때는 파란색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파란색이야! 우리가 찾아다녔던 그 파랑새잖아!" 이는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는 제임스 오펜하임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행복을 이미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찾으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도 없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미'와 '아직' 사이에 놓인 시간인 현재는 더욱 더 불행하게 느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복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스스로 찾아내고 길러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파랑새 증후군'이란 용어는 마테를링크의 의도에서 벗어난 잘못된 것입니다. 급변하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고 현재의 일에는 흥미를 못 느끼면서 미래의 막연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병적인 증상을 뜻하는 이 용어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행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작품의 주제를 오독한 것입니다.
오히려 마테를링크의 행복론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축약어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에 집중하며 행복을 찾는 라이프 스타일을 뜻합니다. 하루키는 그의 수필에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등으로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하루키, '랑겔한스섬의 오후', 실린곳: 무라카미 하루키/김난주 번역,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문학동네 )
그런데 이런 '소확행'을 행복의 전부라고 굳게 믿는다면 이 역시 곤란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에는 고차원적인 '커다란 기쁨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소확행'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소위 '삼포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가 처한 암울한 경제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장기화된 저성장으로 청년실업과 고용문제가 격화되고, 소득양극화의 심화와 계층간 이동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불확실한 취업, 결혼, 육아, 내 집 마련 같은 큰 행복을 좇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소확행'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현상은 노력하면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힘든 상황을 견디기 위해 청년들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찾으려 하며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적어도 하루키가 이 단어를 창안했을 때는 1980년대 일본의 경제 호황시기에 물질만능주의에 휩쓸린 사회적 분위기를 우려하며, 자신만의 참된 행복을 찾을 것을 종용하기 위한 비판적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비판적 맥락이 거세되어 한국으로 건너와 유행하고 있는 '소확행'은 상황을 개선시킬 노력조차 포기한 채 현실에 안주할 것을 종용하는 마취제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의 마지막 장면에서 달아난 파랑새는 이웃집 할머니의 병든 딸을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일으키고 또 다시 떠나버립니다. 자신이 가진 작은 행복을 이웃과 함께 나눌 때 더 큰 행복으로 돌아오는 기적과 같은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주인공들 곁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고 또 멀리 떠나버립니다. 틸틸은 울음을 터뜨리는 할머니의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 울지 마. 내가 다시 잡아 줄게." 지금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꼭 필요한 위로의 말이 아닌가 합니다. '작은 행복'에 만족하고 안주하기보다는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함께 파랑새를 찾아나서는 용기를 서로 북돋아줄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