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교육

[융합수업] 3.1절에는 기미 독립선언서를 읽자(중1)

ddolappa72 2026. 3. 8. 22:07

 

 
삼일절에는 기미 독립선언서를 같이 읽자

새해가 시작되면 달력을 들춰보며 올해에는 공휴일이 몇 일이나 되나 세어보곤 합니다. 하지만 '쉬는 날'이라 해서 모두 국경일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나 어린이날이나 성탄절은 공휴일이지만 국경일은 아닙니다. 또 기념일은 법적 휴일과 관계없이 특정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정해진 날로 식목일(4월5일)이나 스승의 날(5월15일)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로 기념하는 국경일은 법률로 정해져 있으며, 국기법에 따라 국기를 게양해야 합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지정된 국경일로 3.1절(3월1일), 제헌절(7월17일), 광복절(8월15일), 개천절(10월3일), 한글날(10월9일)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휴일에는 5월1일 노동절과 같은 국제적 기념일도 있지만, 3.1절이나 6.25전쟁과 같은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된 기념일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주화 과정 등 특수한 우리의 역사와 관련된 기념일들은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억의 기념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해 특정한 날짜에 반복되는 역사적 기념일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의 특정 사건을 소환하고 환기시킴으로써 우리의 공동체적 기억 속에 특정한 역사적 기억을 새겨넣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를 형성시킨 중요한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함께 발딛고 서 있는 사회적 토대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벼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공휴일은 단순히 노동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이해에 몰두하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서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 보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자각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3.1절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함께 나누기 위해 기획한 수업이 기미 독립선언서를 읽는 것입니다. 선언서를 함께 읽음으로써 그 날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 속 일원이 되어 그들이 느꼈던 벅차오르는 감격과 환희, 울분과 슬픔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그 선언 행위가 현재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리고 희미해져가는 그 날의 정신을 오늘날 되살리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기미 독립선언서 원본(대한민국역사 박물관 소장)

1919년 3월 1일 경성 대한문 앞 등에서 일제 통치를 거부하는 비폭력 저항 시위를 열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



역사화된 공간을 함께 걸으며

우선 한국관광공사TV에서 제작된 '삼일절 독립선언서 같이 읽기' 영상을 함께 시청했습니다. 이 영상의 특징은 현대어로 해석한 독립선언서를 3.1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사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읽는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서대문형무소,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였던 보신각,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미국인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머물렀던 딜쿠샤 등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들에서 낭독되는 독립선언서를 듣노라면 독립에 대한 수많은 이들의 간절한 열망이 여전히 이땅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승동교회, 효창공원, 경교장, 심우장 등 다양한 사적지들에서 있었던 일들을 반추하고, 그곳을 방문했던 경험들을 나누며, 역사가 우리와 상관없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의 발밑을 단단히 받혀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단지 책만 읽어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역사적 현장을 방문한 자들만이 과거와의 교감을 통해 얻을 수 특별한 경험입니다. 현장체험 교육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달력에 표시된 기념일이 역사적 그 순간으로 우리를 반복해서 인도하는 타임루프 장치라면,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 있는 사적지는 공간화된 기억의 저장장치입니다. 공간이 간직한 역사적 기억은 그곳을 직접 방문해서 온몸으로 공간을 느끼고, 그날의 흔적들을 자신의 손으로 더듬거릴 때만 전달될 수 있는 특별한 지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책이나 영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역사적 지식과는 다른, 오직 현장을 방문한 사람에게만 말은 건내는 그 특수하고 개인적인 깨달음만이 우리가 더 깊은 역사 속으로 파고 들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습니다. 

그래서 최근 학교에서 스쿨버스의 미비나 학생들의 안전성 문제로 현장체험 교육을 중단하고 있는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역사 공부는 역사적 현장을 방문해서 체험하는 활동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책임회피 혹은 편의성을 핑계로 다음 세대에게 꼭 필요한 학습 기회를 박탈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요즘 들어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 많은 외국인들이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고 역사적 현장을 찾으며 우리 문화의 우수성에 감탄하는 추세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자국의 역사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현장 교육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있는 이 희한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독립운동가 조소앙(1887~1958)
3.1 태극기 삼일절 에디션 태극기에 민족대표 30인을 그려넣었다. 원래는 33인이지만 후에 친일로 돌아선 3명은 그려넣지 않았다.ⓒ 주환선



우리는 어떻게 이 땅의 '주인'이 되었나

기미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이 첫 문장이 선언서의 고갱이며, 오늘날 우리가 이 선언문을 읽어야 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문장을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그 당시의 시점에서는 지금과는 다르게 읽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나라의 주인을 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다른 역사적 상황과 인식 격차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이 문장을 읽게 되면, 이 선언이 갖고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력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 뿐더러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바쳐야 했던 지난하고 부단한 피와 땀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선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조약을 맺은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내외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11년 일제는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해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조직한 신민회 간부를 대거 체포하는 '105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서북지방의 항일 민족조직인 신민회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미국으로, 김규식은 중국으로 망명하는 등 국내 거점의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빠져나갔습니다. 이어 국내 의병조직인 독립의군부(1912∼1914년)와 대한광복회(1915∼1918년)마저 잇따라 발각돼 의병운동마저 와해되었습니다. 국외 사정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1915년 이상설과 신규식 등이 중국에서 신한혁명당을 설립해 광무황제(고종)를 옹립하는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으나 이 역시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습니다.(기사, 실의 빠졌던 조소앙, 신규식 밀지 받고 다시 '大呼의 길'로) 이 당시의 상황을 독립운동가 조소앙(1887~1958)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막을 거두어갈 무렵, 재외 한인사회는 단결의 희망이 털끝만큼도 없었으며, 국내의 대중들 또한 고요하게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마음이 매우 초조하여 동북지역의 한인들을 규합할 결심을 하고 단신으로 그곳으로 갔다. 당시 한인 교포사회의 거물들은 제각기 영웅으로 자처하면서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의 희망이 없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지린성에서 칩거하면서 독서를 했다.”(조소앙 ‘자전·自傳’·1943년 발표)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고 다시 왕정을 회복하는 것이 독립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절대적 명제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했지만 그 행위의 주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엇갈린 채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14명의 공동명의로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조소앙이 기초한 이 문서는 당시 침체되어 있던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융희 황제(순종)가 삼보(三寶·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경술년(1910년)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의 최초의 날이니, 무슨 까닭인가. 우리 대한은 무시(無始) 이래로 한인의 한이요 비(非)한인의 한이 아니니라. 한인 사이의 주권을 주고받는 것은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이오. 비한인에게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요, 한국의 국민성이 절대 불허하는 바이라.’(‘대동단결선언’)

조소앙에 따르면, 주권은 민족의 고유한 권리로, 융희 황제(순종)가 주권을 포기한 순간 주권은 국민에게 이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날'이 아니라 대한제국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날'이며 동시에 국민이 '주권을 이양 받은 날'로 적극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독립의 주체는 국민이며, 독립을 통해 건국해야 할 나라는 민주 공화국임이 분명해 진 것입니다. 이후 조소앙은 1919년 2월 '대한독립 선언서', 즉 일명 '무오독립선언'를 작성하며 '대동단결선언'에서 제시된 민주 공화제를 한 차원 더 구체화했습니다. 즉 한민족의 자주 독립은 세계 평화라는 보편 가치와 대의에 따른 '국민 주권 회복 운동'임을 천명한 것입니다.(하희정, 국내외 독립 선언문 다시 읽기_3.1운동과 시민 주권)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인식은 이미 1898년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에서 싹튼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부터 백성은 정치적 주체로 자각되기 시작했고, 시민 사회가 중심이 되는 근대 국가에 대한 열망이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인민이 원하지 않아도 황제의 선택에 따라 나라가 통째로 일본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서 주권은 황제가 아니라 백성에게 있다는 인식이 강화되었습니다.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의 국호가 '대한민국'인 것도 새나라의 주인이 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국호를 제안한 신석우(1894∼1953)는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따오고,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을 통해 2,000여 년 이상 중국을 다스린 황제의 전제군주정에 종말을 고하고 건립된 근대적 공화국인 '중화민국'에서 '민국'을 가져왔습니다. 1920년 1월 임정 신년축하회 연설에서 내무총장 안창호는 민주 공화국 탄생의 감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습니다. 과거에는 황제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2000만 국민이 모두 황제요. 제군 모두가 황제란 말입니다. 황제란 무엇이오? 주권자의 이름입니다. 지금은 제군이 모두 다 주권자외다.”(기사, 봉건군주제 뛰어넘은 3·1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씨앗되다)

그러므로 3.1운동은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봉건적인 군주제를 극복하고 근대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분기점을 형성한다면 점에서 '혁명'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미 독립선언문'을 다시 읽는 것은 현재 민주적 시민으로서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재인식하고, 그 뿌리가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기미년 독립선언은 1918년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에 편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이 민족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 민족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같은 패전국들의 영토를 분산시켜서 후발 경제 강국이었던 미국이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전략적 수사였을 뿐입니다. 심지어 미국은 이 원칙은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된다고 제안을 두었지만 파리평화회의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자 그 후 더 이상 거론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1차 대전 당시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이 원칙의 대상국도 되지 못했습니다.

3.1운동을 준비한 이들 대부분은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에 곧바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민족대표 48인 중 하나인 현상윤은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당초 우리가 독립운동을 계획할 때, 꼭 그때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우리에게 적용되리라곤 물론 믿지 않았다. 파리평화회의가 우리 문제까지 토의하지 않을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파리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서한을 보내고 만세운동까지 일으킨 것은, 독립운동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3.1운동이 당시에는 성공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독립을 위한 중대하 단계가 될 것이고, 토대가 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권동진 역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씨앗을 뿌려두면, 언젠가는 반드시 싹이 트고, 누군가 독립의 뜻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곧바로 그 결과까지 보려 한 것은 아니다."(박찬승,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 1919, 다산초당)

즉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는데 영감을 준 하나의 계기였을 뿐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3.1운동은 당장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큰 희생을 치른다고 할지라도, 훗날 언제일지 모를 독립이란 열매를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하고 기획된 것입니다. 이육사의 노래처럼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을 위해 그들은 온몸을 던져 가난한 노래의 씨를 이 땅 위에 뿌렸던 것입니다. 미국이 '독립 선언문'(1776)에서 태어났고, 프랑스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에서 자라났듯이 우리는 '기미 독립선언서'(1919)에서 움트고 아름드리로 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미래 세대를 위해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것일까요? 그 단서 역시 이미 독립선언서에 담겨 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일제가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경도되어 우리로부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빼앗았다고 한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독립을 하게 되면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흔히 문화강국의 꿈을 백범 김구 선생님의 소원과 연결짓지만 이미 3.1 운동의 정신에는 세계 평화와 높은 문화의 힘에 대한  한없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상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맹신하고 힘의 논리를 좇을 때에도 우리의 조상들은 높은 문화의 힘을 굳게 믿고 묵묵히 견디며 마침내 독립을 쟁취해냈습니다. 현재도 세상은 그 때처럼 야만스런 힘의 노예가 되어 평화를 깨뜨리고 무법천지의 야만스런 세계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야만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문화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그 때를 떠올리며 또다시 찾아올 봄날을 위해 평화와 문화의 씨앗을 뿌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