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2학년

이영경, 아씨방 일곱 동무, 비룡소

ddolappa72 2026. 2. 7. 22:23

 
사물인터넷과 가전체소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면 우리는 먼저 도착안내 전광판을 확인합니다. 전광판은 GPS 위성을 통해 획득한 버스의 운행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우리는 그 정보에 따라 버스를 기다릴지 아니면 지하철이나 택시를 이용할지 결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물, 사람, 공간, 데이터 등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어 정보가 생성, 수집, 공유, 활용되는 기술을 통칭해서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이라 부릅니다. 

인터넷이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면, 사물인터넷은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물과 사물'까지도 소통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차량의 시동을 걸거나 심장 박동과 혈압 체크를 하고, 따릉이를 이용해 장소를 이동하는 것 역시 사물인터넷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물인터넷을 통해 초연결 혁명이 더욱 진행될 경우 우리는 인간의 개입 없이 알아서 움직이는 사물들에 둘러싸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마치 영화 <미녀와 야수>(1991) 속 마법에 걸린 세계에 온 것처럼 우리는 말하는 사물들과 소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며 살게 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등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학 기술이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탈바꿈하고 나면 우리가 사물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변화를 겪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사물들의 꾸며낸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가전체(假傳體) 소설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물을 의인화해서 다루고 있는 이 장르는 사물의 시선에서 인간 사회를 바라보고 풍자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제외한 자연, 사물, 기술, 데이터도 '비인간 행위자'로 파악한 브루노 라투르의 통찰을 선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사물들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주인공으로 한 '공방전', 술의 장점을 예찬한 '국선생전'이나 그와 반대로 술의 단점을 비판한 '국순전' 등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의 바느질 도구를 의인화한 '규중칠우쟁론기'는 라투르의 관점을 선취한 탁월한 사례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 동무의 논쟁이 놓친 것들

빨간 두건 아씨에게는 늘 그녀의 손끝을 떠나지 않는 일곱 동무가 있었습니다. 자 부인, 가위 색시, 바늘 각시, 홍실 각시, 골무 할미, 인두 낭자, 다리미 소저가 그들입니다. 어느 날 아씨가 살짝 낮잠이 든 사이 일공 동무들은 아씨의 빼어난 바느질 솜씨가 누구의 덕인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각각의 사물들은 각자의 역할과 기능을 부각시키며 우위를 찾지하고자 했습니다. 자와 가위가 없다면 옷감을 정교하게 재단하지 못할 것이고, 실과 바늘이 없다면 천을 결합해 보자기, 이불, 옷 등을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인두와 다리미가 없다면 구김을 반듯하게 펴서 옷을 더욱 맵시있게 보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골무가 없다면 아씨의 손가락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 아씨가 능숙한 바느질 실력을 펼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논쟁은 중요한 몇 가지 사실들을 빠뜨리고 있습니다. 우선 그들이 ‘규중칠우(閨中七友)’, 즉 아씨 방 일곱 동무로 묶이는 이유는 그들이 함께 관계를 맺을 때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모두 '옷 만들기'라는 실용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소집된 사물들입니다. 그들이 이 네트워크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들의 용도와 의미를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인두는 규방에서 사용될 때는 옷감의 구김을 펴는 용도롤 사용되지만, 죄인을 고문하는 형장에서는 끔찍한 고문 도구로 이용됩니다. 가위 역시 아씨의 손에 쥐어졌을 때와 엿 장수의 손에 들렸을 때 전혀 다른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원래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네트워크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채 네트워크 안에서 각자가 맡은 기능상의 차이를 우월성의 근거로 제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차이를 우월성으로 오인하면서 그들이 서로 상보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도 무시합니다. '재단'이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와 가위가 서로 협력을 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속담처럼 바늘과 실이 함께 있어야 '바느질'을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넓은 면적을 다릴 때는 다리미가 제격이지만 동정깃이나 소맷부리 등 세밀한 부분을 섬세하게 다리기 위해서는 인두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본질과 가치가 자신 안에 내재해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들 각자의 중요성은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펼치는 논쟁의 무의미성은 아씨의 뛰어난 바느질 능력이 도구로서 그들이 지닌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장인이 만들어낸 탁월한 가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이제 막 바느질은 배우는 풋내기 아씨의 손에서 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리 만무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탁월한 기량은 그들과 인간 행위자의 관계 맺음 속에서, 그리고 그런 관계 맺음에서 인간 행위자가 수행하는 행위능력에서 발현되는 효과일 뿐입니다.
 



인간은 사물들의 주인인가

일곱 동무의 다투는 소리에 잠을 깬 빨강 두건 아씨는 모두의 자랑을 듣고 있다가 버럭 화를 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잘 해낸들 내 손 없이 무슨 소용이 있어? 이 몸이 제일이지, 어째서 너희가 제일이야!" 아씨의 외침에 일곱 동무를 할 말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자신들이 보잘것없고, 소중하지도 않고, 없어져도 좋은 물건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씨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자기 주장을 내세우던 일곱 동무들에게 '도구'로서의 지위를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을 침묵시키고 슬픔에 빠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곱 가지 사물들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며,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가치 있는 생산물을 산출해내는 것은 결국 주인이자 인간인 자신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언을 통해 일곱 비인간 사물들은 인간 행위자인 아씨과 대칭적 관계에 있는 '친구'에서 단순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서구의 근대 사회에서 인간과 사물 사이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변화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브루노 라투르에 따르면 서구 근대의 특징은 '정화'와 '변화'의 이중적 행위구조에 있습니다. '정화'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순수한 영역(사회)과 비인간들로 구성된 순수한 영역(자연)으로 분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통해 세계를 몸과 마음, 주체와 객체, 사회와 자연의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행위능력을 오로지 인간에게만 부여하는 근대의 인간중심적 사고가 형성되었습니다. 한편 서구의 근대는 '번역' 작업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존재들 간의 혼합, 즉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들을 무수히 생산해 냈습니다. 라투르는 서양의 근대가 이 두 가지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을 '근대'의 특징으로 오인함으로써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즉 비판적인 정화 작업과 비인간과 인간의 잡종적 동맹이 역사적으로 이미 언제나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가 당면한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브뤼노 라투르/홍철기 번역,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갈무리)

그런데 다시 잠이 든 아씨는 꿈속에서 기막힌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느질을 하려는데 일곱 동무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급해진 아씨는 구석구석을 뒤져 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찾지를 못했습니다. 아씨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꿈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씨는 일곱 동무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했습니다. "너희들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들 중에서 누구 하나라도 없으면 일은 안 되고말고." 

아씨의 깨달음은 자연이나 도구 등 비인간도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능력을 가지고 있는 대칭적 행위자(actor)로 파악하는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 ANT)와 일치합니다. 아씨의 뛰어난 바느질 솜씨는 인간 아씨와 비인간 일곱 동무가 하이브리드를 형성함으로써만 발휘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비인간 사물들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당시 여성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인 바느질 능력을 더 이상 증명할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아씨가 당대 사회에서 누리고 있던 명성마저 위태롭게 되었을 것입니다. 꿈에서 규방칠우가 사라지게 되자 아씨가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난감해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즉 반짇고리에 담긴 사물들은 당대 사회가 여성에 요구했던 실용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었고, 그러한 사물들과의 동맹을 맺지 않고는 그녀의 사회적 존재는 결코 유지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들과 함께 살아간다

결국 아씨가 사물들과의 말다툼을 통해 도달하게 된 새로운 인식은 그녀 주변의 사물들이 그녀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뛰어난 바느질 솜씨를 지녔다고 칭찬을 받는 것이 온전히 자신만의 능력 때문이었다며 오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판은 그녀가 바느질에 필요한 사물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만 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씨가 알아채지 못한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홈질, 감침질, 시침질, 공그르기와 같은 바느질 기법들을 저절로 알았을까요? 그녀는 아마도 조선 시대 여성의 공간인 안채에 머물던 다른 여성들로부터 기초적인 바느질 방법을 습득했을 것입니다. 나이 많은 여성들은 그녀와 일종의 도제 관계를 맺으며 그녀에게 실용적 지식을 전수했을 것입니다. 라투르는 이러한 지식이나 제도 역시 비인간으로 인간과 혼합체를 형성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규중칠우'라 불리던 사물들은 조선의 유교 사회가 여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것을 조형화하던 사물들이기도 합니다. 당대의 남성들은 행랑채에 머물며 '문방사우((文房四友)'라 불리는 종이, 붓, 먹, 벼루를 가까이 하며 지냈습니다. 조선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남성과 여성을 공간적으로도 엄격히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의 사물들을 정교하게 분리해서 배치함으로써 그들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재생산해냈습니다. 아씨가 바느질 도구들이 사라지자 당황해 하며 눈물까지 흘렸던 것은 그녀가 그러한 사물들을 통해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내면화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만일 그녀가 왜 여성은 종이와 붓이 아니라 바늘과 실을 가까이 하며 지내야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더라면 세상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럼에도 '규방칠우쟁론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이 동화는 사물인터넷이나 인공지능과 같은 '살아 있는 사물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쾌한 통찰과 지혜를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주변의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혜안은 21세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