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6학년

허버트 조지 웰스/김석희 번역, 타임머신, 열린책들

ddolappa72 2025. 12. 17. 01:13

 
시간을 여행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소멸하게 되지만 정작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분명히 시간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양자역학과 같은 최첨단의 과학조차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수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로운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터미네이터'(1984), '백 투 더 퓨처'(1987), '12 몽키즈'(1996), '나비효과'(2004),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 '인터스텔라'(2014),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등 수많은 시간 관련 영화들이 제작되었습니다.

이 모든 시간 여행물의 원조는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타임머신'(1895)입니다. 이 소설에서 '시간 여행자'는 시간을 거슬러 이동할 수 있는 신비한 장치인 타임머신을 발명해서 미래로 여행을 다녀오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인 시간은 기계 장치를 통해 앞과 뒤로 이동이 가능한 구체적 공간으로 시각화되어 표현되고 있습니다. 시간을 공간화시킨 이 아이디어가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시간 여행물이 다루는 '시간' 개념에는 공통된 전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시간을 "그 이전 상태의 결과이며, 앞으로 있을 상태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통해 변화된 과거의 시간은 현재의 상태를 변화시키고('백 투 더 퓨처'), 미래를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미래에서 현재로 살인 기계가 보내지기도 합니다.('터미네이터') 즉 시간은 단순히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과성의 사슬에 단단히 구속시키는 조건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여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이 고정된 인과관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자유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웰스의 <타임머신>은 현재에서 과거로의 이동이나 미래에서 현재로의 여행을 다루고 있지 않고, 대신 현재에서 미래로의 여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현재는 미래의 원인이며, 미래는 현재의 결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웰스의 관심은 미래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가 가져올 결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미래 사회를 어떻게 그리고 있고, 그러한 상상을 유발시킨 당대의 현실적 조건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조지 팔 감독의 영화 '타임머신'(1960)의 한 장면



미래의 인류는 왜 퇴화했을까

시간여행자가 80억 년 뒤의 지구에서 마주하게 된 현실은 모든 위대한 문명들은 거의 몰락해서 폐허로 변해 버렸고,  인류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퇴화된 상태였습니다. 엘로이 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겨우 다섯 살짜리의 낮은 지적 수준과 불과 120cm 정도밖에 안 되는 왜소한 신체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하며 거의 완전히 산업화된 국가였던 19세기 영국 출신의 시간여행자가 목도하게 된 미래의 참혹한 현실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류가 쇠퇴하고 종말에 가까워진 원인을 문명화 과정의 결과로 추정했습니다. 인류는 과학기술을 통해 오랜 세월 자신들을 구속하고 속박해온 자연의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결국엔 자연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정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적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인류는 그 반작용으로 더 이상 지적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도 없게 되었고, 적대적 환경에 맞서기 위해 강인한 육체를 단련시킬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필요성과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요구되었던 지성은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완벽한 안전이 보장된 사회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자동화가 편리를 제공하지만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퇴화시킬 것이라는 인식은 유하의 시 '자동문 앞에서'를 떠오르게 합니다.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자동문 앞에서 시인은 우리의 손이 조금씩 퇴화되어 가다가 마침내 '날개 없는 키위 새'처럼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늘을 멀뚱멀뚱 쳐다만 봐야 하는 / 날개 없는 키위새 / 머지않아 우리들은 두 손을 잃고 말 것이다 //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 하는 / 그, 어떤, 문 앞에서는, / 키위키위 울고만 있을 것이다."(유하, '자동문 앞에서')

인공지능이 일상화되고 로봇이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완전하게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할 경우 우리는 과연 현재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삶의 조건은 역으로 인간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그림들. 화려한 결혼식 조찬 모습(위)과 런던의 세븐 다이얼 슬럼가의 모습(아래)



인류는 왜 두 종족으로 나뉘었을까

시간여행자는 인류가 지상에 살고 있는 엘로이 족 외에도 지하에서 살아가는 몰록 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엘로이가 밝은 빛 속에서 달콤한 과일을 주식으로 살아간다면, 엘로이보다 심하게 변형된 인류인 몰록은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피에 굶주린 채 살고 있었습니다. 시간여행자는 몰록들이 엘로이의 시중을 들던 옛날 버릇이 남아 있어서 엘로이의 옷을 만들고 그들을 부양하고 있다고 추리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발견한 끔찍한 진실은 엘로이들이 지상에서의 편리를 누리는 대가로 몰록들에게 육체를 식량으로 제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몰록들에게 엘로이들은 단지 살찐 소 떼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웰스는 왜 미래의 인류가 지상의 엘로이와 지하의 몰록으로 나뉠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사회적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만큼 전세계에서 가장 부강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외관상 화려한 승리의 행진을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부유한 지주들과 공장의 제조업자들은 자유방임주의의 경제적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호의호식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향유했던 반면, 수많은 수공업자들과 농부들은 확대되는 실업의 수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댔고,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16시간의 고된 노동과 형편없는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에서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 영국의 내부에서는 자본주의의 이란성 쌍둥이 형제인 사회주의의 맹아가 동시에 잉태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엥겔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1845))

"우리 시대의 문제에서 출발하면, 오늘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격차가 점점 벌어진 것이 그 모든 상황의 관건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불을 보듯 뻔해 보였습니다. (....) 새로운 전철이 있고, 지하도가 있고, 지하 공장과 지하 레스토랑이 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가 점점 심해져서 결국에는 산업이 지상에서의 생득권을 차츰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산업은 점점 더 커지는 지하 공장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 그곳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 ! 지금도 이스트엔드의 노동자들은 지구의 자연스러운 표면과 사실상 단절된 인공적인 조건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부유한 사람들은 좋은 교육을 받아서 점점 세련되고 우아해지는 한편, 가난한 사람들의 상스럽고 난폭한 태도와 부자들의 간격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배타적 경향을 갖게 된 부자들은 이미 자신들을 위해 지표면의 상당 부분을 울타리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런던 일대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의 곳의 절반 정도는 침입을 막기 위해 폐쇄되어 있습니다. 이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것은, 부자들의 경우 오랫동안 많은 비용을 들여 고등 교육을 받기 때문이고, 세련된 습관에 대한 유혹과 거기에 필요한 시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계층 간 결혼이 사회 계층을 구분하는 경계를 따라 우리 인류가 쪼개지는 것을 저지하고 있지만, 빈부 격차가 이렇게 벌어지면 계층 간 결혼이 촉진하는 계층 간 교류가 점점 뜸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지상에는 쾌적함과 안락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진 자>들이 살고, 지하에는 <못 가진 자>, 즉 자신들의 노동 조건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노동자들이 살게 될 겁니다."

웰스는 시간여행자의 입을 빌려서 당대의 시대적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지상과 지하로 생활공간이 나뉘는 추세가 심해지고 있고, 그들의 품성과 성향조차 배타적 교육에 의해 더욱 분화되는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빈부격차는 단순히 경제적 차이에 의한 소득 수준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거공간의 격차, 문화적 취향의 차이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해서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계층 구분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화가 더욱 극심해져서 결혼에 의한 계층 간의 교류가 단절되고 같은 계층 간의 동족혼이 지속될 경우 마침내 엘로이와 몰록 같은 종족들로 인류가 분화될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웰스의 <타임머신>은 공상과학 소설의 외피로 둘러싼 사회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시간여행자를 과거가 아닌 미래로 여행을 보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당대의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될 경우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예측하기 위해 그는 시간을 가속화해서 미래로 여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 전체가 진보하기는커녕 끔찍한 종말을 목전에 둔 미래 사회를 그려보임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독자들이 당대 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갈등에 주목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위나가 남긴 희망의 꽃

이 소설에서는 도래할 파국적 미래를 암울하게 그려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도 동시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위나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시간여행자에게 감사의 표시로 주었던 하얀 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그 꽃을 "지성과 체력이 사라진 뒤에도 감사하는 마음과 서로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안간의 가슴 속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시들어 버린 그 꽃이 극심한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두 계층 간의 불화를 잠재우고 평화와 공존으로 이끌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웰스가 이 소설에서 제시하는 해법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합니다. 헤겔에 따르면 '자기의식'이란 인간이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의식은 자신의 자립성을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다른 자기의식이 자신을 자기의식으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자기의식으로 의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진정한 자기의식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자기의식은 오직 다른 자기의식 속에서만 스스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헤겔/임석진 번역, <정신현상학1>, 한길사)

그런데 나를 인정해줘야 할 사람은, 무엇보다도 내가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 '나'라는 자기의식을 인정해주는 '너'라는 자기의식이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판단되면 그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해도 그 인정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정할 만한 '너'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진정한 자기의식에 이르고, '너' 역시 인정받을 만한 '나'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의식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나'와 '너'가 상호인정을 통해 동시에 진정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행복한 관계는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한쪽만의 행위는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발생해야 하는 것은 오직 양쪽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헤겔)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는 이처럼 평등한 상호인정이기보다는 불평등한 관계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긴 하지만 상대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상태에 빠지며 이 둘의 관계는 투쟁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를 헤겔은 '인정투쟁'이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두 개의 자기의식의 관계는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각자마다 서로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서로 자기의식을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에서 승리하여 지배자가 된 자는 주인(der Herr)이 되고, 죽음을 겁내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패배한 자는 노예(der Knecht)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정립된 순간 이들 관계에서 극적인 역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주인이 된 '나'는 자신보다 열등한 '너'인 노예로부터 인정을 받아 봐야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의식을 유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주인은 노예에게 노동의 고통을 떠맡기고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예의 노동에 의존해야 하는 비자립적 존재가 되고 맙니다. 반면에 노예는 '죽음의 공포'를 처절하게 체험하면서 삶의 존질인 무상성을 깨닫게 되고, 또한 '노동'의 산물인 사물의 형상에서 다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립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을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위나의 꽃이 상징하는 '감사'와 '사랑'은 웰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차용해 사회적 통합의 원리로 변형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퇴화한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감사'와 '사랑'은 상대를 자신처럼 자립적 존재로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긍정할 때만 성립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감사하고 아끼는 마음만 지닐 수 있다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상호파멸에 이르는 치명적 투쟁을 멈추고 함께 번영과 평화를 누리게 될지 모릅니다. 여전히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는 오늘날 위나의 저 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천천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