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도네르/최윤정 번역, 거짓말을 먹고 사는 아이, 비룡소

토마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토마는 엄마한테 이야기하는 걸 아주아주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토마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의례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은 학교에서 어땠어?" 그러면 토마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엄마는 "너, 그 얘기 굉장하다!"라고 감탄하곤 합니다. 토마가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엄마에게서 바로 이 '굉장하다'는 말을 간절히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토마는 화장실에 두 시간이나 갇힌 여자애 이야기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꾸며 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도 토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토마는 엄마가 자기 말을 믿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수록 더 억지를 부리며 과장해서 이야기를 늘어 놓았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거짓말쟁이 취급을 하고 싶지 않아서 망설이다가 억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말 굉장한 얘기네." 도대체 토마는 왜 거짓말을 시작한 것일까요?
어린 아이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거짓말을 하곤 합니다. 이 책의 토마는 엄마한테 칭찬과 관심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엄마가 동생을 돌보느라 아주 바빴기 때문에 이전과 달리 토마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곤 했거든요. 그리고 토마는 받아쓰기 0점, 생활 태도 20점을 받아온 날도 배가 아파서 그랬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경우는 부모에게 혼이 날까봐 두려워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한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 때문에 토마는 멀쩡한 맹장을 떼어내는 수술까지 받게 되었고, 부모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 작품은 아이의 거짓말을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단정하지도 않고 교훈적 설교를 늘어놓지 않는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토마의 부모는 즉각적으로 아들을 꾸짓는 대신 신중한 태도로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들이 점점 더 엄청난 거짓말을 꾸며 내게 될까봐 거짓말쟁이 취급을 하지 않으려 하고, 아빠는 오히려 토마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칭찬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토마가 거짓말쟁이와 시인 중 어느 쪽일지 끝까지 고민하게 됩니다.


세계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 크리스 도네르는 토마의 거짓말을 색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내야 하는 창작자의 입장입니다. 토마가 단순히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거짓말을 꾸며낸 것은 아닙니다. 토마는 보다 근본적으로 "뭔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욕구"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유난히 단조로운 학교 생활로 인해 토마는 엄마한테 들려줄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짜야만 했습니다. 즉 토마가 거짓말을 하도록 추동한 근원적 문제는 "그럴듯한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였습니다.
그래서 토마는 길거리에서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길 기대하기도 했고, 아파트 단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유리창 한 장만이라도 깨주길 고대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경비원 아저씨가 부엌칼을 들고 아줌마를 쫓아서 뛰어가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엘리베이터가 자기 집 앞에 도착하기 전에 고장이라도 나길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엄마한테 들려줄 그럴싸한 이야깃거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토마에게는 어떤 충고를 해야 좋을까요?
토마는 가족들과 다 같이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온 세계가 이야깃거리"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뉴스는 그 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가 좀더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면 이야깃거리가 부족할 일은 드물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신기하고 특별한 사건만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토마의 생각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이야기꾼은 그런 특이한 사건들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건이라 할 지라도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재구성해서 비범한 이야기로 만드는 자입니다. 토마가 자신 주변의 평범한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자기만의 색깔을 입힌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토마의 이야기를 듣고 "너, 그 얘기 굉장하다!"라며 감탄할 것입니다.

거짓말쟁이에서 시인으로
토마는 처음에 오직 엄마를 독자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엄마와 달리 아빠는 화장실에 갇힌 여자애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고 오직 좋은 점수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토마는 엄마만큼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짜라고 믿어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토마가 아직 자신과 세계가 분리되지 않은 유아적 세계에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라캉이 말한 '거울단계'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서 그 거울 이미지를 따라 '상상적으로' 자아를 구성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구성된 상상적 자아는 기만적 환영으로, 아이는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치게 되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인 상징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를 통해서 관계를 맺는 세계입니다.
토마가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인식하는 엄마한테 이야기하는 대신 자신을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으로 여기는 아버지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으로 책이 마무리됩니다. 이것은 토마가 말의 세계인 엄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문자의 세계인 아빠의 세계로 이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토마가 거짓말쟁이에서 허구의 창작자로 위치가 변경된 것을 의미합니다. 토마는 이제부터 거짓말을 한다는 오명을 벗고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인이 된 것입니다. 아무도 시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시인은 괴테가 말한 것처럼 허구의 형식을 통해 진실을 찾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그들이 거짓말을 했던 상황을 글로 써 보라고 하면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했던 상황을 글로 옮기며 자신의 행위와 상황 자체를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되고, 무엇이 잘못되고 또 무엇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분별하게 됩니다. 문자는 말과 달리 거리감을 전제로 한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거짓말이 상상력과 창조성의 근원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발 하라리 역시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아 지구를 지배하게 된 이유는 '허구'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믿게 만드는 능력에 있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허구 덕분에 인류를 성경의 창세기, 민족주의 신화 같은 공통의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렇게 생산해낸 상상의 질서 위에서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고 고도의 추상적 질서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거짓말 역시 인간의 생존 본능과 연결된 활동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거짓말을 도덕적으로 용인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만 어린이의 거짓말을 윤리적 관점에서만 판단하려 들지 말고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어야 그 문제를 생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제안정도로 받아들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