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시, 본다는 것, 너머학교

부시맨과 콜라병
어느 날 칼라하리 사막을 지나가던 경비행기 조종사가 콜라를 마신 뒤 빈병을 아무렇게나 버렸습니다. 난생 처음 콜라병을 보게 된 부시맨족 사람들은 그것을 '신이 보낸 물건'이라 생각했습니다. 콜라병의 용도를 몰랐던 부시맨들은 그것을 곡식을 빻는 데 쓰기도 하고, 악기처럼 다루기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 그 병을 독차지하고 싶어 했고, 그로 인해 평화롭던 마을에 큰 분쟁까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주인공 자이는 마을의 평화를 깨트리는 콜라병을 세상의 끝에 가져가 신에게 돌려주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영화 <부시맨>(1980)은 '본다'는 지각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부시맨들은 그들이 보고 있는 대상인 콜라병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원래의 쓰임에서 벗어나 빻는 도구, 악기, 물병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사물의 원래 사용 목적에서 벗어난 이러한 일탈이 문명인들에게 웃음을 유발합니다. 그런데 부시맨들의 입장에서 문명인들을 역으로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물건을 어리석게도 한 가지 목적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하다니 참으로 딱하다고!
우리는 바깥 세계의 많은 정보를 눈을 통해 받아들이고, 보는 것만으로 알게 된다고 믿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그것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 지식으로 인해 어떤 대상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본다'는 활동은 우리의 '앎'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김남시의 <본다는 것>은 시선과 앎이 맺고 있는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플라톤의 이데아론부터 스마트폰이 가져온 변화까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흥미진진한 논의를 펼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부터 철학, 미학, 심리학, 과학 등 다양한 학제를 넘나드는 통섭적 글쓰기 방식은 청소년들은 물론 교양에 목마른 성인 독자들에게도 강렬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앎은 본다는 것의 조건이다
어떤 자극이 우리 눈의 시신경을 자극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의식이 아직 그것을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는 낮은 단계의 지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인지하는 높은 단계의 지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적인 작용, 즉 '앎'이 개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앎'은 우리의 눈이 어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인지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메워 주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눈은 카메라로 무엇인가를 찍는 활동과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이러한 '앎'이 없이도, 다시 말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렌즈를 통해 들어온 외부 사물의 이미지를 그대로 포착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카메라는 보이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편견 없는 눈을 갖고 있지만, 인간은 아는 대로밖에 볼 수 없는 선입견에 오염된 눈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대부분은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무지개는 실제로 일곱 빛깔뿐일까요? 사실 무지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적인 색의 흐름입니다. 뉴턴 이전까지 사람들은 플라톤을 따라 색깔들이 흰색과 검은 색의 혼합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색광에 검은색이 약간 섞이면 빨간색이 되고 파란색으로 변했다가 검은색이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프리즘 실험을 확장시켜 무지개를 분리한 뉴턴은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계가 일곱 개였다는 데 착안해서 무지개도 일곱 색깔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로 우리의 눈은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을 지닌다고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문화권이 무지개의 색을 일곱 가지로 정한 것은 아닙니다. 아시아에서는 무지개의 빛을 오방색(정, 적, 황, 백, 흑) 전통에 따라 '오색 무지개'로 부르기도 합니다. 문화적 배경에 따라 무지개의 색깔조차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앎'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6세기경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코뿔소를 목판화에 새겨 넣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알지 못하던' 코뿔소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힌트는 그가 남긴 그림에 있습니다. 그림에 묘사된 코뿔소의 표피는 중세 기사들이 입던 갑옷처럼 두꺼운 앞가리개 같은 것을 차고 갑옷의 대갈못 같은 무늬가 있는 두꺼운 표피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뒤러가 '알지 못하던' 코뿔소를 그리기 위해 그가 이미 '알고 있던' 지식과 상상에 의존해서 '본 적이 없는' 동물을 그렸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처음 보는 낯선 것이나 심지어 본 적이 없는 것조차 자기가 아는 것에 의지해서 볼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아는 것을 다르게 보는가
그런데 우리는 '앎'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의 대상을 모두 동일하게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착시 그림입니다. 왼쪽 그림에서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커다란 흰 잔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에서 우리는 고개를 돌린 여인을 볼 수도 있지만, 거대한 코를 가진 여인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한 그림에서 서로 다른 형태를 보게 되는 까닭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정도나 관심, 욕망 등이 서로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의식이 통일성, 연속성, 유사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착시가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즉 사람의 뇌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정보 중에서 필요 없는 것은 지우고 기억하기 쉬운 상태로 정리해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볼 때 커다란 흰 잔은 '배경'으로 사라지고, 흰 잔이 '전경'이 되어 앞으로 나올 때 마주보는 두 얼굴은 배경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갖고 있는 지식에 따라 대상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 감각에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은 사물을 인식할 때 주변에 있는 요소들 간의 관계와 맥락을 고려해서 적극적으로 감각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게슈탈트 심리학은 우리가 지각하는 '통일적 전체로서의 형태'인 '게슈탈트(Gestalt)'는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라는 명제를 따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인지할 경우 그것은 개별 이미지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맥락적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고려해 능동적으로 '형태'를 인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우리가 같은 대상을 앞에 놓고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이 능력은 우리가 예술을 창조하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기존의 해석과 틀을 벗어나 세상의 사물들을 '다르게' 보는 방식을 제시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왔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에 의존해서 해방감과 자유를 만끽하고, 또다른 세상을 꿈꿔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미지의 반역'은 보는 이에게 혼란을 유발하는 작품입니다. 캔버스에는 하나의 파이프가 그려져 있고 바로 그 아래에는 불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니 대체 화가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림에서 보는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닙니다. 실제 파이프라면 그림 속 파이프를 들고 불을 붙여 담배를 필 수 있어야 합니다. 기껏해야 그림 속 파이프는 비록 현실의 파이프와 닮았지만 캔버스 위에 늘러붙은 물감의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마그리트의 그림 속 이미지와 언어의 대립은 실재와 그것의 재현인 가상 사이의 균열을 시각화하며, 회화의 임무는 외부 세계의 재현에 있다는 우리의 오래된 믿음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그리트 그림에서 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파이프일까요, 파이프 그림일까요, 아니면 파이프를 그린 사람의 마음과 생각일까요?
끌로드 모네는 루앙 대성당을 모델로 연작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왜 루앙 대성당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그렸을까요? 그가 화폭에 담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모네의 연작 그림은 그가 대성당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회화의 목표로 삼지 않고, 오히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에 따른 색채의 변화를 화폭에 담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가를 놓고 내기를 벌인 이래로 외부 세계를 똑같이 재현해야 한다는 회화의 오래된 임무는 사진이 떠맡게 되었습니다. 재현의 의무로부터 해방된 현대 회화는 그 대신 가시적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네는 빛과 색이 인간의 마음에 남긴 '인상'을 추적했고, 마그리트는 변화한 회화의 조건 자체를 탐사했던 것입니다.
현대 미술에 나타난 반재현적 경향은 조각에도 발견됩니다. 피카소는 1915년에 '바이올린'이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작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채색되고 접힌 철판들을 쇠줄로 엮어 놓은 이상한 쇳덩어리일 뿐입니다. 어떻게 봐도 우리가 '아는' 바이올린과 비슷한 곳을 도통 찾기 어렵습니다. 굳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작품에서 바이올린으로 볼 만한 점을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재현의 원리에 충실한 이전의 그림이나 조각과는 달리 파카소의 작품에서는 우리 눈앞에 있는 것과 작가가 보라고 말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즉 작품을 이루는 물질적 재료들과 그 재료들이 재현하는 대상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이 간극을 뛰어넘어 예술작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물질적 성질을 건너뛰어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시각 매체들은 우리의 시선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현미경, 망원경과 같은 광학기구부터 사진과 같은 시각 기록 매체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고안한 시각 도구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정확히 말해 그러한 매체들을 통해 사물들에 관해 새로운 지식이 축적되면서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 역시 결정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병의 원인을 인간의 악행과 그로 인한 신의 분노로 해석하거나, 악마나 악귀의 소행으로 치부하곤 했습니다. 질병의 원인에 대한 파악이 이러다 보니 그에 대한 대처도 신 앞에서 속죄하거나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식의 미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미경을 통해 그 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세균의 존재가 밝혀지며 항생제의 발견과 신약 개발을 통해 인류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이 직접 개발한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레오 이전에는 달을 완벽한 수정구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망원경으로 직접 관측한 달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표면이 매끈하기는커녕 울퉁불퉁한 산맥과 골짜기도 있었고 운석구덩이도 보였습니다. 천상계의 달 표면이 지구의 표면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무려 2천 년 간 맹목적으로 믿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완벽한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목성 주위를 도는 총 79개의 위성 중에서 갈릴레오가 가장 큰 네 개의 위성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우주의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굳건히 만들어 놓은 그러한 체계를 뒤엎을 만한 결정적 증거를 발견한 것입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덕택에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진의 발명은 인간의 시각을 더욱 결정적으로 변화시켜 왔습니다. 인간의 눈은 아주 작거나 거대한 것, 매우 느리거나 빠른 것은 볼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진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바깥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서 보여주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그림 '앱솜의 경마'(1821)와 에드위어드 머이브리지의 사진 '달리는 샐리 가드너'(1878)를 비교해 보면 사진이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확장시켰는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선 제리코의 그림과 머이브리지의 사진 속 말들을 비교해 보면 미묘한 차이가 발견됩니다. 제리코의 말들은 네 다리를 쫙 펴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머이브리지의 사진을 보면 말이 전속력으로 달릴 경우 공중에 떠 있을 때가 있으나 그때 네 다리는 구부려 모아져 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 인간의 눈은 달리는 말들의 다리를 정확히 관찰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은 그렇게 그리는 회화 전통이 수립되었던 것입니다. 제리코는 기존의 '앎'에 충실해서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머이브리지의 말 사진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말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진 덕택에 인류는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순간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진은 인간의 시각이 지닌 한계를 확장시켜 인류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간의 틈새를 볼 수 있게 만든 매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쓰여 있지 않은 것을 읽기 위하여
인류는 오래 전부터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국가와 개인의 운명을 읽어내려고 했고, 손금이나 관상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과 장래를 읽어내려고 해왔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모습과 형태로부터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물이나 사태를 알아내고, 유추하고, 예측하는 활동을 사람들은 '읽는다'라고 말해 왔습니다. 즉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보고 읽어 왔고, 바로 그 능력 덕분에 현재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발터 벤야민은 '쓰여 있지 않은 것의 읽기'를 가장 오래된 읽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언어가 생기기 이전부터 동물의 내장이나 별 그리고 춤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읽어내려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물들 간에 비감각적 유사성을 발견해내려는 인간의 오랜 능력이 남김없이 그대로 들어간 매체가 언어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읽는다'는 것을 함축한 활동입니다. 이때 '읽는다'는 것은 언어로 쓰여 있지 않은 것에서 '의미'를 유추하고 구성하는 활동을 뜻합니다. 가령 귀가 후 마주한 엄마의 얼굴에서 감정 상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예상치 못한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는 쓰여 있지 않은 것을 정확히 읽어내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생각을 조금 더 확장시키면 우리가 책을 읽는 것 역시 쓰여 있지 않은 것을 읽는 것입니다. 흔히 책읽기를 글자를 읽어내는 활동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책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쓰여 있지 않은 것, 즉 작가의 의도나 읽는 이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작가가 이런 글을 써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독서를 통해 나의 마음 속에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이며, 나는 왜 그렇게 책을 읽었을까. 행간에 쓰여 지지 않은 채 담겨 있는 이런 사유의 편린들을 읽어내는 연습을 앞으로의 독서 교육에서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