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6학년

황순원, 소나기, 다림

ddolappa72 2025. 8. 31. 21:09

 
황순원의 '소나기'는 '산골소년의 슬픈 사랑얘기'인가

'냇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 흐르는 냇물에 발담그고 / 언제쯤 그애가 /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며 / 가슴은 두근거렸죠' 가수 예민이 부른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1992)는 아름다운 노랫말과 서정적 멜로디가 돋보이는 곡입니다. 노래 속 주인공 소년은 풀잎새에 예쁜 꽃송이도 엮어서 정성껏 예쁜 꽃모자를 만들었습니다. 꽃처럼 예쁜 소녀가 써주기를 한껏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소년은 기대에 부푼 채 징검다리에서 그애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노을이 분홍빛으로 물들고 어느새 구름 사이로 저녁달이 빛나건만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년이 그애를 위해 정성스레 만든 꽃모자는 노을로 물든 냇물 위로 둥둥 떠내려 가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어느 작은 산골소년의 슬픈 사랑얘기'입니다. 아마도 예민의 이 노래는 황순원의 <소나기>(1953)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해석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린 작품을 읽고 '순진한' 시골 소년과 '잔망스런' 서울 소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던 소설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어 보니 책으로 사랑을 배웠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설렘이 되살아나면서도 문득 과연 그렇게 읽는 것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우선 소설가 황순원은 왜 6.25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1953년 5월 <신문학>에 이 작품을 발표한 것일까요? 곧 죽을 운명이었던 소녀는 왜 굳이 소년에게 접근해서 친구가 되려고 했던 것일까요? 왜 어른들은 소녀를 '잔망스럽다'고 평했을까요? 소녀의 죽음을 알게 된 소년은 그 뒤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의문들은 너무나 익숙한 이 작품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도록 저를 부추겼습니다.
 

안재훈 감독의 애니메이션 <소나기>(2017)



소년은 왜 처음에는 소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나

소설 초반부에 소년은 소녀가 벌써 며칠째 징검다리에 앉아 기다리는데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며 개울둑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운좋게 지나가는 사람을 따라 개울을 건널 뿐이었습니다. 소년의 이런 태도는 흔히 그의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설은 소년과 소녀의 사회적 지위, 취향과 성향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극단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대대로 마을을 호령하던 "윤 초시네 증손녀딸"인 소녀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인 소년은 각각 서울과 시골 출신으로 성장 배경이 달랐습니다. '흰 피부'의 소녀는 '분홍 스웨터'와 '남색 스커트'를 입은 반면, '검게 탄 얼굴'을 한 소년은 '무명 겹저고리'와 '장방이'를 입었습니다. 소년이 무밭에서 '맵고 지린' 무를 간식으로 먹었다면, 소녀는 제사에 올리는 '단 맛' 나는 대추를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소년이 처음에 소녀의 접근을 달가와 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그의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이 지닌 아비투스(Habitus)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사회적 위치, 교육 환경, 계급 위상에 따라 후천적으로 체득된 취향을 '아비투스'라고 불렀습니다. 그에 따르면 특정 계급의 구성원들은 타 계급과 구별되는 아비투스를 지향하며 계급적 구별짓기를 이루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공고히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아비투스의 차이로 인한 남녀 간의 오해와 갈등은 이미 김유정이 <동백꽃>(1936)에서 유머러스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

소년에게 소녀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향한 몸짓과 신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소년에게 소녀는 '바보'라고 하면서 조약돌을 던지는 행위를 통해 소년의 의식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소녀가 던진 조약돌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고, 다만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허전함'만 느낄 뿐이었습니다. 소년은 소녀가 자신에게 남긴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소녀의 행동을 모방했습니다. 소녀가 했던 것처럼 징검다리의 가운데에 앉아 물장난도 쳐보고 물 속을 응시했지만 단지 검게 탄 자신의 얼굴만 보았을 뿐입니다. 소녀는 소년이라는 타자의 존재를 의식하고 조약돌을 던지는 행위를 한 반면, 소년은 자신이 소녀라는 타자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체라고 오인하고 있기 때문에 개울물이란 스크린 위에서 자신의 검게 탄 얼굴만 보았던 것입니다. 즉 소년은 소녀와 달리 인간 주체가 바라보는 주체이자 타인에 의해 보여지는 객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유아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녀의 행동을 모방하던 소년은 소녀의 갑작스런 출연으로 화들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소년은 자신이 소녀에게 줄곧 관찰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숨어서 내 하는 꼴을 엿보고 있었구나.'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 생각해 왔던 소년은 그 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인식을 획득하게 됩니다. 자신의 무지가 적나라하게 노출되며 소년이 받게 된 정신적 충격과 혼란은 '코피'로 상징화됩니다. 소년은 이제 순수하지만 무지했던 유아의 세계와 결별하고, 성과 사랑을 알아가는 사춘기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영남 감독의 <소나기>(1979)



현실 밖으로의 여행

소녀가 '바보'라고 외치며 내던진 작은 '조약돌'은 소년이 안온하게 거주해 왔던 공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소년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던 결핍과 욕망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자신이 알고 있던 협소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 소녀와 함께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소년은 소녀와 함께 "저 산 너머"로 소풍을 가게 되는데, 이 표현에서 강조점은 '산'이 아니라 '너머'에 있습니다. 즉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눈에 보이는 저 '산'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미지의 장소입니다. 비록 소년은 소녀와 함께 '산 너머'는커녕 '산'에조차 도달하지 못했지만, 소녀와 함께 일상의 시공간에서 벗어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소녀와의 소풍은 초월적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녀와 함께 있는 공간 안에서 소년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소녀를 뒤따르는 대신 그보다 더 앞서 달려 나갔습니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도 애써 잊어버리려 했습니다. 전에는 조심스럽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소년은 새로운 자아상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독수리입니다. "쪽빛으로 한껏 개인 가을 하늘이 소년의 눈 앞에서 맴을 돈다. 어지럽다,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가 맴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은 소녀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자신감을 키워나갔습니다. "이번은 소년이 뒤따라 달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곧 소녀보다 더 많은 꽃을 꺾었다." 그 정점은 소년이 아직 코뚜레도 꿰지 않은 송아지의 등에 올라탔을 때입니다.

(가)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트가 안고 있는 곷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묶음 같다. 어지럽다. 그러나 내리지 않으리라. 자랑스러웠다. 이것만은 소녀가 흉내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 소녀에 대해 파편화되고 불명확했던 소년의 인식은 '하나의 큰 꽃묶음'으로 종합됩니다. 동시에 소년은 소녀는 할 수 없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즉 소녀가 꽃처럼 아름답지만 이미 완성된 채 한 장소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정적인 존재라면, 자신은 송아지처럼 활동적이고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내재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미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송아지 위에서 얻은 소년의 깨달음이 사실은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서글픈 운명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사실을.
 



보랏빛 소나기를 맞으며 죽음을 경험하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한 소년이 소녀와의 만남을 통해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일종의 통과의례(rite of passage)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산 너머'로의 소풍은 비일상적 세계로의 '분리 의식'이며, 소나기를 만나서 함께 비를 피하는 사건은 '전이 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기 위한 시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전이 의식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독특한 점은 소년이 소녀의 죽음에 동행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소녀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소녀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다) 다시 소년은 꽃 한 옴큼을 꺾어 왔다. 싱싱한 꽃가지만 골라 소녀에게 건낸다.
그러나 소녀는,
"하나도 버리지 말어."

(라) 무명 겹저고리를 벗어 소녀의 어깨를 싸 주었다. 소녀는 비에 젖은 눈을 들어 한 번 쳐다보았을 뿐, 소년이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그러면서 안고 온 꽃묶음 속으로 가지가 꺾이고 꽃이 일그러진 송이를 골라 발 밑에 버린다.

(마)  소녀가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소녀가 안고 있는 꽃묶음이 우그러들었다. 그러나 소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 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적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소년에게 소녀는 처음부터 '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소녀에게 선물한 꽃묶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지가 꺾이고 꽃이 일그러지다가 소년과 소녀의 몸이 밀착되는 순간 우그러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꽃으로 상징되는 소녀의 죽음이 예고되던 순간은 역설적으로 소녀가 인간으로서 가장 따뜻한 생명의 온기를 느꼈던 순간이기도 합니다. 소년과 소녀가 등을 붙이고 비를 긋던 속이 빈 수숫단은 일종의 자궁 같기도 합니다. 그곳은 생명이 탄생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예고하는 신탁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탄생한 그곳으로 다시 회귀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빈 수숫단 속 공간은 오직 따뜻한 생명의 온기만 가득한 공간이며, '몸 내음'과 같은 외부세계의 차이와 차별이 침입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소녀가 소년에게 전해준 사랑의 비밀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은 사회적 신분이나 취향의 차이를 넘어선 것이며, 시든 꽃 하나 버리지 않고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설령 소중한 선물이 망가지거나 상대의 몸 냄새가 역겹더라도 그것을 참아내고 인내하며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라고. 사랑은 자신은 비를 맞으면서도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뿐인 겹저고리를 벗어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함께 맞은 그 소나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을 재촉하게 될 지언정 죽은 것처럼 살 바에야 차라리 소나기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삶이 더 나은 것이라고.
 

소설가 황순원(1915~2000)

 

소설가 황순원의 제자이자 후배 작가들이 그를 기리며 ‘소나기’ 뒷이야기를 상상해 쓴 헌정소설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



'잔망스런' 소녀의 마지막 유언

이 소설은 소년과 소녀의 목가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진 삶의 세계 이면에는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랑이 필요하다고 이 소설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죽기 전에 자기가 죽거든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녀의 스웨터를 물들인 '검붉은 진흙물'은 소년과의 소중한 추억의 징표였기 때문입니다. 소년의 등에서 옮은 그 얼룩이야말로 소녀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기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소녀의 수수께끼 같은 유언을 듣고 '잔망스럽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소녀에 대해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요? 소녀의 무엇이 과연 '잔망스러운' 것일까요? 우선 그들은 어린 소녀가 죽으면서도 완강하게 자기 주장을 했다는 사실에 당돌하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부탁이 어른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 못할 사연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소녀의 마지막 전언은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소년만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연인 사이에 주고 받는 사랑의 말들은 당사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암호화된 코드입니다. 제3자들에게는 그저 무의미한 수수께끼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소년만은 소녀가 남긴 그 말의 의미를 아마도 분명히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소녀는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넘어가고, 가문의 대가 끊기는 외적 상황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잔망'스럽습니다. 죽음 앞에서 재산과 가문 같은 조건은 무의미할 뿐이며 오직 생명과 사랑만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는 소녀를 맹랑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어른은 드물 것 같습니다. 가문과 함께 몰락하는 대신 스스로 먼저 몰락하기로 선택한 소녀는 여리지만 단호한 태도로 어른들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이제 곧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면 끝까지 지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선택한 그것이 과연 생명과 사랑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나요?

이 소설을 이렇게 읽고 나니 소설가 황순원이 왜 6.25 전쟁이 채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써야만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동족상잔의 참상을 목격한 소설가는 감당하기 힘든 상처와 슬픔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순수했던 동심을 되찾아주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소설가는 이미 파괴되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글을 쓰는 대신 죽음과 파괴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꺼지지 않고 조용히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을 일깨워서 그들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소녀는 죽었지만 소년은 자신의 삶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얼룩처럼 남은 소녀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고, 또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