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교육

뭉크의 <절규>를 보고 이야기 만들기(초등 6학년)

ddolappa72 2025. 6. 22. 23:03
뭉크의 <절규>(1863)

 
뭉크의 <절규>는 어떤 그림인가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그림 <절규>(1893)는 현대인이 일상에서 겪는 인간 존재의 원초적 불안과 공포를 절묘하게 포착해서 지금껏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심지어 영화 <나 홀로 집에1>(1991)의 악동 주인공 케빈이 표정을 따라하기도 하고,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슬래셔 영화 <스크림>(1996)에 등장하는 살인마가 착용하는 가면으로 등장할 만큼 뭉크의 <절규>는 수많은 대중 문화 속에 패러디되거나 인용되며 현대 예술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뭉크가 누리는 현재의 대중적 인기와 상관없이 화가의 개인적 삶은 죽음의 공포와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뭉크가 다섯 살 때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한 살 위 누나 소피에도 14살 때 동일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 라우라는 정신병으로 병원에 격리되고 말았습니다. 가족들을 연이어 잃은 슬픔과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광신도가 되어 뭉크를 정신적으로 학대했습니다. 이런 불운한 가정사는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아 뭉크는 평생 자살충동과 불안, 강박장애로 시달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내 곁에 공포와 슬픔과 죽음의 천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놀 때도 나를 따라다녔으며 봄날의 햇살속에서도, 여름날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도 따라왔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작품의 제목이 '절규'인 이유가 화면 중앙에 있는 해골과 같은 얼굴 모양을 한 남성이 내지르는 비명 때문인 것으로 오해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극심한 공포에 떨며 밖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귀를 손으로 막고 있습니다. 뭉크는 산책 중 자연으로부터 들려오는 절규를 듣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제목 '절규'는 자연이 내지르는 끔찍한 외침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림을 책처럼 읽기

이 그림을 이용해 수업을 했을 때 먼저 그림 전체에 대한 인상을 물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괴하고 공포스럽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의 어떤 요소들이 그런 감정을 불러 일으켰는지 설명해 보라고 했습니다. 우선 핏빛으로 물든 하늘, 심하게 요동치는 검푸른 바다, 유령처럼 흐늘거리는 신체와 해골 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뒤쫓는 정체 모를 두 인물 등이 불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했습니다.

화면의 구도나 화가의 붓터치, 그리고 색감 등은 어떻게 느껴지는지 물었습니다. 화면을 사선으로 분할하고 있는 붉게 물든 다리가 비스듬히 놓여 있어 불안감을 유발한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화가가 붓을 거칠게 칠해서 인물이나 하늘 등의 형태를 일그러뜨리고 있어서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 불편하다고도 했습니다. 화면 속 모든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색으로 칠해져서 마치 다른 현실처럼 보인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 화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그렇게 그렸을지 추측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모든 요소들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불안감과 공포를 유발시킨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뜯어서 읽은 뒤 화가의 의도가 무엇일지 유추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읽게 되면 그림에 대한 풍성한 감상이 가능해 집니다.


그림을 보고 이야기 만들기

만일 그림 속 인물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서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다들 굉장히 외롭고 무서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늘을 피로 물들고 바다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요동치는데 뒤에서는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쫓아오는데 혼자 다리 위에 서 있으니 얼마나 공포스럽고 끔찍할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고 했습니다. 아마 뭉크는 평소에 그런 심경으로 살았던 것 같고, 그래서 자신이 느꼈던 그런 심경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그제서야 비로소 이 그림이 화가의 내면 풍경을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이 그림에 나오는 요소들을 이용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창작해 보라고 했습니다. 귀를 막고 있는 남자나 그를 뒤따르고 있는 다른 두 명의 정체는 아직까지도 모호해서 아이들의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가 많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아이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요?

(가) 나는 억만장자였다. 나는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사업가였다. 내는 내 회사에 내 평생을 바쳤다. 우리 가족은 빈민가의 평범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막내 아들이었던 나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의 형제들은 열심히 일해가며 대학에 보냈다. 그리고 나는 가족들의 노력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20대부터 내 청춘과 건강과 심지어는 체면을 포기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세계에 들어닥친 물결은 나라도 피할 수 없었다. 우리 회사를 비롯한 수많은 회사가 무너졌고 나라는 망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빚은 불어만 갔다. 지금 나에게 남은 건 늙은 몸뚱아리와 수많은 빨간딱지, 배 고프고 굶주린 직원들밖에 없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살리기 위해 난 저기 걸어오는 사람들, 사채업자들에게 간다. 더 이상 살 가치도 없기에.

이 학생은 뭉크의 그림을 보고 얼마 전 읽었던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IMF 때 다리 위에서 목숨을 내던져야 했던 수많은 가장들이 생각나 이렇게 글을 썼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른 재치있는 글도 많았지만 유독 이 학생의 글이 기억에 남는 건 노르웨이 사람 뭉크의 그림을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춰 다시 읽어내는 독창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을 비춰봄으로써 스스로를 더 깊게 알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관점에서 작품을 읽어내는 연습을 통해 자신은 물론 해당 작품 역시 더 풍성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앞으로도 자신만의 관점에서 독창적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연습을 계속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