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1

박석근, 수상한 화가들, 사계절(2)

ddolappa72 2025. 6. 22. 20:58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1819)

 
아름다움의 이상은 불변하는 것인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인가

프랑스의 화가 앵그르는 젊은 시절 신고전주의의 대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미술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유학을 가서 라파엘로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그가 유학 기간 중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바로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입니다. 붓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매끈한 화면은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선명하고 생생합니다. 등을 돌리고 침대 위에 걸터앉은 여인은 피부는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깨끗하고 투명합니다. 절제된 구도에 담긴 인체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은 단순하지만 완벽한 형식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한 점의 작품만으로도 앵그르가 생각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이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즉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미의 전형을 재현하는 것이 화가인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축한 단정한 형식미, 조화와 균형, 명료성이야말로 영원한 아름다움의 전형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앵그르의 그림은 여러 가지 의문을 낳습니다. 과연 예술에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는가? 그러한 아름다움을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따라야 할 엄격한 규칙이 있는가? 19세기 프랑스인이 수백 년 전의 그리스 사람들이 정해놓은 미적 규칙을 따르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1819)은 앵그리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작품이 형상화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814년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루이 18세의 부르봉 왕조가 왕정에 복귀했습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아프리카 서북북에 있는 세네갈로 항해하던 메두사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선장 유듀로와 드 쇼마레이는 배의 선장은 해본 적이 없었지만 왕당파였다는 이유로 배의 선장에 임명된 사람으로 침몰 사고가 발생하자 승객들은 그대로 바다 위에 내버려둔 채 일부 선원들만 이끌고 도망쳤습니다. 배의 잔해를 모아 만든 뗏목 위에 남겨진 150명의 승객들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먹어가며 버텼지만 표류한 지 12일만에 구조되었을 때는 겨우 열다섯 명만이 생존해 있었습니다. 부르봉 왕실은 이 이야기가 나라에 퍼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결국 생존자들의 증언이 책으로 출간되고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나라 전체가 분노로 들끓었습니다. 한마디로 메두사호 사건은 프랑스판 세월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전해 듣고 분노한 20대의 젊은 화가 제리코는 이를 가로 7m, 세로 4.9m의 거대한 화폭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뗏목 위에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는 시체더미들, 저 멀리 지나가는 영국선박 아르고호를 향해 구조의 손길을 요청하는 절막한 몸짓들, 위태롭게 출렁이는 거친 파도 등 감정을 휘몰아치는 격정적인 묘사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리코의 이 그림은 앵그르의 그림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우선 제리코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재현하고 있는 난파 사건은 실제 발생한 재난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러한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국가라는 배가 침몰했을 때 지도자가 국민을 구하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먼저 도망친 상황에 대한 도덕적 분노와, 극한상황에서 직면하게 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과 잔인함에 대한 성찰이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결국 제리코에게 그림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앵그르와 달리 화가 자신이 속한 역사적 현실을 작가의 주관적 감정을 실어 형상화하는 것에 의미를 둔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리코는 32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가 남긴 그림은 낭만주의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마중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들라크루아는 왜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는 여성을 그렸을까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은 흔히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광경을 그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1830년 7월 28일에 발생한 프랑스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것입니다. 당시 국왕이었던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는 7월 선거에서 반왕당파가 압승을 거두자 위기를 느끼고 출판의 자유를 금지하고 하원을 해산시키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혁명을 일으켜 성공한 끝에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며 이후 프랑스는 완벽한 공화국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보며 항상 드는 의문은 왜 화면 정중앙에 가슴을 풀어해치고 한 손에 총과 프랑스 국기를 든 여성을 그렸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녀는 길거리에 뒤엉킨 채 쓰려져 있는 시체들을 딛고 서서 자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잔혹하고 끔찍한 시가전의 상황을 그리면서 왜 젊은 여인을 등장시킨 것일까요? 그림의 제목처럼 작가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것일까요? 

우선 화면 속 여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로마 신화 속 '자유의 여신'인 리베르타스에게 영감을 받아 표현된 의인화된 캐릭터인 마리안느입니다. 그녀가 쓰고 있는 모자는 프리지아 모자라고 불리는데 로마 시대 자유를 획득한 노예들이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오른손에 치켜들고 있는데, 파랑색은 자유, 하얀색은 평등 그리고 빨강색은 박애를 나타냅니다. 그녀는 마치 프랑스 구국의 영웅 잔 다르크처럼 민중들을 이끌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그 사건이 지닌 세계사적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림 속 여인은 자유의 상징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힙니다. 화가는 마리안느를 화면 전면에 배치해서 자유와 평등을 향해 역사를 발전시키는 주체가 민중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왼편에 피스톨을 든 어린 소년을 그려 넣음으로써 미래에도 자유를 향한 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인의 오른편 뒤쪽에서 양복 차림에 소총을 들고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써 들라크루아는 자신도 기꺼이 그런 역사적 흐름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



모네의 그림은 왜 비난을 받아야 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모네, 마네, 드가, 르누아르, 고흐, 고갱 등 인상파 화가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인상주의(Impressionism)란 명칭은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1972)를 조롱한 명칭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척한 새로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역으로 그 당시 평론가들이 왜 모네의 작품을 비판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네의 그림을 처음 본 사람은 아마도 화가가 도대체 무엇을 그리려 한 것인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감을 섞지 않은 채 원색 그대로 이리저리 치대놓은 그림은 명암이 사라져 거의 평평한 모습이고, 대상들마저 뚜렷한 윤곽선이 소실되어 형태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앵그르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모네의 그림은 미숙한 화가가 그린 미완성 그림으로 보이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단점들이 바로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이 회화의 역사에 가져온 새로운 혁신입니다.

인상주의 회화가 탄생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당대 화가들이 직면했던 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19세기 중반 카메라가 등장하게 되면서 화가들은 생존의 위협을 절실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화가들은 바깥 세계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임무를 맡아왔고, 그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서 긍지를 느껴 왔습니다. 그런데 카메라의 등장으로 화가들은 점차 재현의 특권을 박탈당했고, 사진가의 작업을 보조하는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화가들은 이제 자신들의 활동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성찰해야만 했고, 사진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회화의 영역을 개척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고민과 성찰 끝에 그들이 내놓은 대답이 인상주의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비좁은 화가의 아틀리에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서 쏟아지는 햇살을 캔버스에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색채의 변화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담아내려 했습니다. 때 마침 발명된 튜브 물감은 그들이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증기 기관차의 등장은 도시의 시민들에게 여행의 욕구를 불러 일으켰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직접 목격한 경이로운 장면들을 화폭에 담아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산업혁명의 상징인 증기 기관차나 기차역, 거대한 현대식 다리, 신비로운 자연의 풍경들이나 이색 건축물 등이 그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게다가 활발한 해외무역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온 일본의 채색판화 우키요에는 원근법과 같은 유럽 회화의 기본 규칙을 과감하게 무시함으로써 인상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런 배경 지식을 가지고 모네의 그림을 다시 살펴 보면 그가 무엇을 그리려 했던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동틀 무렵에 안개가 낀 르 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아침 햇살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감정을 색채와 색조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인상주의에서 '인상'이 뜻하는 바가 빛이 인간의 내면에 남긴 '인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상주의의 등장으로 바깥 세계를 재현해야만 하는 의무에서 해방된 근대회화는 앞으로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계속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뒤샹의 <샘>(1917년 원본의 복제품)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



변기도 예술작품인가

1917년 미국 뉴욕의 한 예술 전시회에 한 남성이 남성용 소변기를 출품했습니다. 그는 그 소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R.Mutt'라는 서명까지 남겼습니다. 현대 미술의 출발을 알리는 마르셀 뒤샹의 등장은 이렇게 도발적이고 발직한 질문을 미술계에 던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왜 소변기는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가?"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고 싶나요?

뒤샹은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대신에 대량 생산되어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제시했습니다. 그가 행한 창조적 행위는 오브제를 선택하고, 그것에 제목을 붙이고, 사인을 남긴 것이 전부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독창적인 사람이며, 그가 만든 작품은 세상에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우리의 고정 관념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가나 예술작품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런 관념 역시 18세기 유럽의 발명품에 불과합니다. 그 대신 뒤샹은 예술가란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으로 재정의합니다. 그에 따르면 작품을 구성하는 형태나 재료 등의 물질적 요소가 그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게 됩니다. 설령 그가 전통적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예술적 재능이 없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오브제를 일상의 맥락에서 분리시켜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면 그는 그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 냈기 때문에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뒤샹의 도발적 문제 제기를 통해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는 가차 없이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뒤샹의 생각을 더 밀고 나간 것이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입니다. 워홀은 유명한 세제 상품인 브릴로의 포장상자를 나무상자 표면에 색을 칠한 후 실크스크린으로 상품 로고를 찍어 똑같이 만든 후 자신의 첫 개인전에 선보였습니다. 골판지로 만든 진짜 브릴로 상자와 합판으로 만든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똑같이 보이는 두 상자 중 어째서 하나는 상품을 담은 그냥 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워홀의 문제작에 대해 미국의 유명한 미술 비평가 아서 단토는 한 물체를 예술작품으로 결정하는 데에는 아름다움처럼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론적 특질이 결정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예술작품을 구분하는 결정적 특질로 제시한 것은 '구현된 의미'입니다. 이에 따르면 진짜 브릴로 상자는 상품을 포장한다는 의미만 지닌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이 아니지만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대량생산되는 상품을 소비하는 현대인의 삶을 박제한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아서 단토/김광우, 이성훈 번역,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문화)

단토는 현대 예술은 더 이상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구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이로써 예술은 종말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고 있던 전통적 개념의 예술은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려운 것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술의 종말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데, 그로 인해 모든 일상적인 것은 예술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단토의 주장을 기술적으로 실현해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사진을 찍거나 몇 줄의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면 사진사나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더라도 적절한 개념어를 선택해서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대신해서 멋진 그림을 그려줍니다. 심지어 음악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각종 미디(MIDI) 장치를 활용해 사운드를 디자인하면 새로운 노래를 창작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수많은 창작물 속에서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과 의미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식별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미술사 교육을 통해 안목을 육성하는 수업이 반드시 필요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