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비룡소
온달은 정말 바보였을까
사회적 지위가 낮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남자가 아내의 내조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게 될 경우 그 남성을 종종 '바보 온달'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혹은 평강공주처럼 자신을 이끌어줄 여성을 기대하는 남성의 심리를 '온달 콤플렉스'라 칭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온달 이야기는 오늘날 현대 남성들의 마음 속에 내재한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의 소망을 반영한 설화로 기억되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온달 이야기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서 현재와는 다른 미래를 꿈꾸는 여성의 심리를 가리키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남성 버전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실린 '온달 열전'이나 이에 바탕을 두고 개작된 동화를 읽어 보면 우리의 상식이나 통념에서 벗어난 온달과 평강공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온달은 흔히 '바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지능이 부족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큰' 다부진 체격을 갖고 있었지만,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에 다 떨어져서 구멍이 숭숭 난 옷을 입고 눈 먼 어머니를 위해 구걸을 해야 할 만큼 딱한 처지였습니다. 커다란 체격과 궁색한 행색이 어울리지 않는데다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그의 선한 심성은 충분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법합니다. 게다가 그는 아이들이 "거지 바보, 바보 거지!"라고 놀려도 화를 내기는커녕 빙긋 웃고 넘길 만큼 너그럽고 선량한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그가 '바보 온달'로 알려진 것은 순전히 <삼국사기> 원문에 '우온달(愚溫達)'이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愚)'자에는 '어리석다'는 뜻도 있지만, '우직하다'거나 '심성이 착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달을 '바보'라 부른 것은 그의 순박하고 우직한 태도나 비천하고 남루한 겉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평강공주는 왜 온달과 결혼했을까
온달은 6세기 후반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559년-590년) 때 인물입니다. 평원왕의 또다른 시호는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평강공주라는 호칭은 공주의 본명이 아니라 '평강왕의 딸'을 뜻합니다. 그런데 평강공주는 어린 시절 엄청난 울보였던 듯합니다. 평원왕은 사랑하는 둘째 딸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공주가 울 때마다 '네가 계속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라고 겁을 주었고, 공주는 그 이야기에 놀라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합니다.
문제는 평강공주가 아버지의 협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평강공주는 귀족가문과 혼담이 오갈 만큼 성장했을 무렵 아버지인 왕에게 온달과 혼인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당황한 평원왕은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그냥 한 말이었을 뿐 실제로 온달과 결혼시킬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권위나 왕으로서의 위엄으로도 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대체 평강공주는 왜 이런 고집을 부렸던 것일까요? 철없는 사춘기의 이유 없는 반항이었을까요?
평강공주는 임금의 말이 지닌 엄중함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습니다. 임금이 내뱉은 말은 아무리 사소해도 실없는 말이 없으니 자신과 온달을 결혼시키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딸의 날카로운 논리와 명분에 할 말이 없어진 평원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딸을 궁궐 밖으로 내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에서 내쫓긴 평강공주는 곧바로 온달의 집을 향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나라에서 유명인사였던 온달에 대해 익히 들어왔고, 그에 대해 사전 조사를 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와 다짜고짜 청혼 요구를 하는 평강공주를 온달은 여우 귀신이 틀림없다며 매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아리따운 여인이 눈 먼 홀어머니를 모시며 겨우 구걸로 연명하는 남루한 자신과 결혼할 리가 없다면서 말이지요. 왕도 꺾을 수 없었던 고집쟁이 평강공주는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온달과 그의 노모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달의 마음을 움직인 그녀의 주장이 흥미롭습니다. 혼인은 '마음이 맞는 자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강공주는 가문의 이해득실에 따라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반감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비록 가난하고 신분도 비천하지만 순박하고 올곧은 심성을 갖고 있었던 온달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결혼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그녀의 가출이 청소년 시기의 일시적 방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밀한 성찰을 통한 신념에 의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서로를 성숙시키는 만남
평강공주와 온달은 부부로서 연을 맺게 되자 전과는 다른 인격체로 성장했습니다. '바보'라 불리던 남자는 누더기와 땟국물을 씻어내고 늠름하고 용감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울보'였던 여자는 비루먹은 말이 사실은 명마라는 사실을 알아챌 만큼 혜안을 지닌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평강공주가 일방적으로 온달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세간의 오해와 달리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고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이상적 관계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해마다 열리는 삼월삼짇날 사냥대회에서 온달은 빼어난 솜씨를 뽐내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귀족들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고구려 사회에서 3월3일의 사냥대회는 가장 많은 짐승을 잡으면 신분과 관계없이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미 평양성에서 '바보 온달'로 유명했던 청년은 전국민이 주목하는 '사냥 오디션'에서 1등을 하면서 갑자기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온달의 잠재력은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큰 체격'에서 이미 암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평강공주가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주지 않고 그에게 훈련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었을까요? 온달의 성공담은 사회적 차원에서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소득 계층이나 사회적 사각 지대에 놓인 청소년들 중에는 온달처럼 재능을 펼쳐보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사장시키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음지에 있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양지로 이끄는 것은 비단 그들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큰 이득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처럼 저출산으로 인해 젊은이가 부족한 현실에서 청소년 한 명이 가진 재능과 역량이 전보다 더 귀중합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평강공주의 마음으로 그들에 대한 지원과 보살핌을 아끼지 않는다면 수많은 온달들이 등장해 공동체를 더욱 풍성하고 활기차게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온달의 관은 왜 움직이지 않았을까
평원왕이 죽고 평강공주의 오빠가 26대 영양왕으로 등극했을 때 장군이 된 온달은 출정을 자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수복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그 땅을 우리 고구려 땅으로 만들지 못하면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소." 그러나 온달은 신라군과 교전을 벌이던 중 화살에 맞아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수십 명의 군사들이 온달의 시신을 담은 관을 옮기려 해도 마치 땅에 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평강공주가 한달음에 달려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셨어요. 사랑하는 온달님. 우리 이제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그러자 비로소 관은 서서히 발걸음을 떼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꼼짝하지 않던 온달의 시체가 그의 아내 평강공주의 손길이 닿은 후에야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평강에 대한 온달의 절절한 사랑을 감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지 않고서는 순순히 이승을 떠날 수 없다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온달 이야기를 실은 목적이 과연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을까요? 김부식은 1145년 71세의 나이에 <삼국사기>를 완성했고 1151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평생 합리적 유학자로 살아온 노학자가 왕의 명령으로 편찬된 역사서에 과연 낭만적 사랑 이야기를 꼭 삽입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열쇠는 온달의 '맹세'에 있습니다. 온달은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고,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자 죽어서도 자신의 말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온달 이야기 전체가 약속에 관한 코드가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평강공주가 아버지 평원왕의 요구에 맞서서 귀족 가문의 청년 대신 바보 온달과 결혼하겠다고 고집한 것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요청에 다름 아닙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아니 오히려 왕이기 때문에 말을 가볍게 내뱉어서는 안 되며 한 번 발화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 평강공주의 일관된 주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 평강과 뜻을 함께 했던 온달 역시 죽는 순간까지 약속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유학자 김부식이 온달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포함시킨 까닭은 그것이 고구려가 막강한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미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신의'가 충만할 때 그 나라는 외부의 침입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 김부식의 통찰이었습니다. 실제로 고구려는 말기에 연개소문이 왕 대신 대막리지라는 관직에 올라 집권을 하며 왕과 신하 간의 신의를 파괴했고, 그의 사후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되면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독자는 텍스트를 자신의 관점에서 매번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생명력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고 풍성한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을 때 지속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독자의 창조적 독서는 텍스트의 목숨을 연장하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사랑 이야기를 오늘날 어떻게 다시 쓸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좋은 접근 방식이 될 듯합니다.